* 재무제표를 읽는 사람들의 기사는 작성 후 최소 1주일 경과된 시점에 무료 공개되고 있음에 유의 하시기 바랍니다.
'재무제표 톺아보기'는 말 그대로 어떤 한 기업의 재무제표를 샅샅이 살펴 사업이나 재무와 관련된 이슈를 찾아보고 분석해 보는 코너입니다. '기업공시에 숨겨진 이야기' 시리즈가 장편소설이라면 재무제표 톺아보기는 분석의 범위가 특정 기업을 벗어나지 않는 단편소설쯤 될 것 같습니다. 굳이 소설이라고 한 이유는 재읽사의 콘텐트가 분명한 사실(fact)에 기반을 두지만, 사실과 사실을 엮는 과정에서 많은 상상과 추리가 동원되기 때문입니다.
재읽사가 톺아볼 첫 번째 재무제표는 '한진중공업의 숨가쁜 자금거래와 그 이면'의 연장선으로 한진중공업의 필리핀 자회사 HHIC-Phil Inc (이하 수빅조선소로 명명합니다)로 정했습니다. 수빅조선소는 한진중공업 위기의 시작이자, 위기 그 자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외부에서는 수빅조선소가 어느 상태인지 자세히 알 길이 없습니다. 필리핀 법인이라서 국내에 공시 의무가 없습니다. 한진중공업이 자신들의 치부를 자진해서 드러내지도 않고요. 아마도 재읽사의 이번 글이 공중을 대상으로 수빅조선소의 재무제표를 톺아보는 첫 사례가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수빅조선소 매각? 유상증자?
한진중공업이 수빅조선소의 지분 85%를 필리핀의 우덴나 코퍼레이션에 매각하는 협상을 진행 중이며, 매각 금액은 약 1조원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는 보도가 석달 전쯤에 있었습니다. 당시 모 매체가 매각이 막바지에 있다고 기사를 썼는데, 그로부터 석달 이상이 지났지만 아무런 소식이 없습니다.
대규모 유상증자(외자유치)와 지분매각이 동시에 진행된다는 보도도 그 전에 있었습니다. 역시 후속 보도는 없습니다. 채권단이나 한진중공업그룹도 입을 다물고 있고요. 한진중공업의 주가에 큰 영향을 줄 수 있는 재료인데, 그 흔한 조회공시도 없습니다.
유상증자와 지분매각은 돈이 들어오는 곳이 다릅니다. 유상증자를 하면 수빅조선소의 자본이 확충되는 것이고, 지분 매각을 하면 한진중공업에 돈이 들어옵니다. 물론 두 가지 방식이 동시에 진행될 수 있습니다.
수빅조선소가 대규모 유상증자를 한다면 유동성 가뭄을 해갈하는 좋은 계기가 될 것입니다. 차입금을 상환해 재무구조를 개선하고 막대한 이자비용도 줄일 수 있으니 수익성에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대규모 유상증자는 곧 경영권 양도로 이어질 수도 있으니 한진중공업에도 중대한 영향을 줄 것입니다.
1조원의 현금을 받고 수빅조선소를 매각한다면, 한진중공업에게는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죠? 수빅의 늪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데다, 급한 차입금을 거의 다 갚고 자율협약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유상증자를 할지, 지분매각을 할지, 매각을 하면 정말 1조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인지 한진중공업그룹이나 채권단이나 언론이나 중계를 해주지 않으니 알 도리가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수빅조선소의 현재 상황을 냉정한 외부인의 시선으로 따져보고, 유상증자나 지분매각 등의 현실성을 가늠해 볼 수는 있습니다. 물론 대주주와 채권단, 그리고 제3의 투자자들은 입장이 서로 달라 선택도 같지 않을 수 있습니다. 특히 대주주는 다른 이해관계자와 완전히 다른 생각을 할 수도 있겠지요.
그건... 어쩔 수 없지요. 우리는 우리의 입장에서 관전하거나 판단하면 될 일입니다. 재읽사는 그저 읽겠습니다. 나머지는 독자 여러분께 맡깁니다.
수빅조선소의 적자는 어디에서 오는가
여러 각도로 찾아봐도 수빅조선소의 재무제표를 구할 수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한진중공업은 모회사로서 수빅조선소를 포함한 연결재무제표를 작성합니다. 계열사의 사업이나 재무상황에 대한 쪽 정보들을 금융감독원의 공시사이트에 공시를 하기도 합니다. 그 정보들을 조합하면, 비록 '톺아보는' 수준까지는 갈 수 없을지 몰라도 수빅조선소의 상황에 대해 얼추 비슷하게 추정을 할 수는 있습니다.
위 차트는 수빅조선소의 실제 매출액과 추정 매출액을 비교해 본 것입니다. 약간의 오차가 있지만 비슷하게 흘러갑니다. 특히 2016년 이후는 거의 같습니다. 그렇다면 같은 방식으로 매출총이익과 영업이익을 추정해 보는 것도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한진중공업이 공시한 당기순이익 뿐 아니라, 재읽사의 추정으로는 영업이익, 심지어 매출총이익도 적자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매출액이 감소추세로 접어든 2016년 이후 매출액보다 매출원가가 훨씬 큰 상황이 3년째 이어지고 있고, 2015년 이전에는 약간의 매출총이익이 나고 있었던 것 같지만 의미있는 정도는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수빅조선소는 배를 만드는 곳이니, 매출<매출원가라는 것은 선박을 수주한 가격보다 제작하는 비용이 더 들어간다는 의미가 됩니다. 정말 손해보고 팔고 있는 것이죠.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경우는 (1)저가 수주 (2) 높은 고정비 두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
수빅조선소는 2015년에 수주잔량 세계 10위에 들 정도로 큰 조선소입니다. 상당한 고정비 부담이 있을 겁니다. 일례로 2017년 연결재무제표상 한진중공업의 감가상각비는 800억원이 넘습니다. 그런데 한진중공업만의 감가상각비는 180억원 정도입니다. 나머지 600억원 이상의 감가상각비 대부분은 수빅조선소에서 발생할 것입니다.
고정비 부담이 클수록 더 많은 매출이 필요합니다. 비싸게 많이 파는 게 제일 좋지만, 그게 어려우면 싸게라도 많이 팔아야겠죠. 저가 수주의 유혹이 생길 수 있습니다.
미청구공사 잔액은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
위 차트는 수빅조선소가 대규모 적자를 낸 2016년 이전부터 미청구공사 규모가 상당했음을 알려줍니다. 미청구공사는 공사원가가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발주처에 공사대금 지급요청을 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또는 지급요청을 했지만 거절을 당했거나). 처음 수주계약을 할 때 추정한 공사원가보다 더 많은 공사비가 들었을 때 미청구공사가 주로 발생합니다. 발주처로부터 인정을 받으면 공사대금을 받게 되지만, 그렇지 못하면 손실이 됩니다.
미청구공사는 재무상태표상으로는 자산으로 기록이 되지만, 손실 처리될 가능성이 매우 높은 계정과목입니다. 공사미수금이나 매출채권처럼 운전자본 중 하나이지만, '받을 권리가 없다'는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습니다. 이게 많으면 분식을 의심해 봐야 합니다. 대우조선해양이나 국내의 내로라하는 건설사들이 해외에서 발생한 미청구공사 때문에 한바탕 홍역을 치른 것을 아실 겁니다.
미청구공사를 유발하는 악마의 유혹이 바로 저가 수주입니다. 일단 일감을 확보하고 보자는 심정으로 싸게 주문을 받았으니 이익을 남기려면 공사비를 아껴야 할 것입니다. 그게 어디 쉽습니까. 공사기간이 늘어질 수도 있고, 인건비와 각종 자재의 단가가 높아질 수도 있고, 공사에 하자가 발생할 가능성도 훨씬 커지겠지요.
재읽사의 생각에는 수빅조선소가 높은 고정비와 저가 수주의 이중 덫에 걸린 게 아닌가 싶습니다. 한진중공업은 공사손실이 발생할 것으로 예상되면 그 금액만큼을 공사손실충당금에 계상하고 당기손실로 처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공사손실충당금을 미청구공사에서 차감(또는 초과청구공사에 가산)하고 있습니다.
지난해 이후 수빅조선소의 미청구공사가 크게 줄고 있습니다. 발주처로부터 공사대금을 받아냈을 가능성도 있지만, 공사손실로 털어내고 있는 과정일 수도 있습니다. 매출총이익이 여전히 적자를 보이고 있는 걸로 보아서는 후자쪽에 무게를 실어야 할 것 같습니다.
수빅조선소의 수주경쟁력은 회복될 수 있는 것일까
어찌되었든 미청구공사가 해소되고 있는 것은 다행입니다. 묵은 잠재손실을 털어내면 턴어라운드에 큰 도움이 됩니다. 어두운 밤이 지나면 새벽이 오기 마련이지요. 수빅의 밤도 끝나가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찬란한 아침을 맞이할 수 있을지는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본원적인 사업경쟁력이 있는 기업은 재무적인 곤경을 벗어나면 벌떡 일어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기업이라면 혹 떼려다 혹 붙이는 꼴이 될 수도 있습니다.
수빅조선소는 좋은 일감을 충분히 수주할 수 있는 잠재적인 경쟁력이 있는 곳일까요. 이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한진중공업 입장에서는 수빅을 살리기 위해 새로운 피를 수혈할 것인지(유상증자), 이쯤에서 모자관계를 정리하고 다른 곳으로 떠나보낼 것인지(지분매각) 결정하는 기준이 될 수도 있습니다.
재읽사가 본원적인 경쟁력을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재무제표 속의 숫자로 현시(顯示)되고 있는지는 파악할 수 있습니다.
올해 상반기 수빅조선소의 매출액은 2000억원이 채 안됩니다. 지난해 동기의 절반에 미치지 못합니다. 하반기에도 나아지지 않는다면, 자산규모 1.7조원짜리 조선사의 1년 매출이 4000억원에도 미치지 못하는 상태가 될 수 있습니다.
일감이 없어도 너무 없습니다. 기존의 일감은 바닥이 드러나고 있지만 새로운 일감이 충분히 들어오지 않습니다. 도크는 많이 비어 있을 겁니다.
결국은 현 상황을 어떻게 볼 것이냐의 문제입니다. 100kg이 넘는 거구가 하루에 죽 한 그릇으로 버티며 누워 있습니다. 충분한 식사를 제공해 기운을 차리게 할까요. 죽 한 그릇에 어울리는 체중으로 다이어트를 하게 할까요. 수빅조선소의 잠재적인 사업경쟁력을 어떻게 평가할지에 달렸다고 봅니다.
잠재적으로 존재하는지는 몰라도, 지금까지 그 경쟁력을 입증하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2조원의 일감을 쥐고 있던 2013~2014년의 시절도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그 일감의 질이 썩 좋지 않았을 거라고 짐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조선업에 다시 봄이 왔다는 지금, 수빅조선소의 일감은 늘지 않고 있습니다.
수빅조선소의 문제는 재무구조일까요, 수주경쟁력일까요.
얼마를 갚아줘야 할까
수빅조선소는 올해 6월말 현재 자산이 약 1.7조원, 부채가 약 9000억원, 자기자본이 약 8000억원 정도입니다. 한진중공업이 그동안 납입한 자본이 1.9조원 정도이니, 약 1.1조원 가량의 손실을 입은 셈입니다.
그래도 자본잠식은 아닙니다. 필리핀은 우리나라와 달리 자본금을 늘리지 않고 자본잉여금만을 늘리는 유상증자가 가능합니다. 그동안 수빅조선소에 이루어진 유상증자는 모두 자본잉여금(주식발행초과금)을 늘리는 형태로 이루어졌습니다. 자본잠식이니 아니니 따지는 것 자체가 의미없습니다.
사실 조선소 건립을 위한 출자는 2009년 이전에 끝났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이후로는 수빅조선소의 재무구조 개선을 위해 대여금 등으로 지급했던 채권들을 출자전환한 것입니다. 그리고 지난해 수빅조선소의 유동성 보강을 위해 1억 달러를 현금출자했지요. 2009년 이전에 조선소를 짓느라 8000억~9000억원 내외, 그 이후에 적자를 메우느라 1조원 내외가 투입됐다고 보면 얼추 맞을 것 같습니다.
위 표에서 오렌지색으로 표시된 부분이 수빅조선소의 차입금으로 추정됩니다. 다른 계열사의 차입금이 극히 일부 섞여 있을 수는 있습니다. 의외로 단출합니다.
수빅조선소의 부채는 약 9000억원 정도이지만, 이중 1700억원 가량은 본사인 한진중공업에 대한 매입채무 등입니다. 외부 금융기관에 갚아야 할 실질적인 차입금은 6000억원 정도입니다. 올해 상반기에 800억원 가량의 외화단기차입금을 상환했습니다.
단기차입금의 만기가 연장될 수 있다면, 급한 것은 올해 말에 갚아야 하는 3700억원 정도의 장기차입금입니다. 메트로 뱅크 등 필리핀 현지은행에서 빌린 선박 제작금융 등으로 보입니다.
산업은행과 한진중공업이 수빅조선소의 매각으로 방향을 잡았다면, 단순히 수빅조선소의 차입금이 부담스러워서는 아닐 것 같습니다. 오히려 좀처럼 살아날 조짐을 보이지 않는 수주실적과 보증채무에 대한 우려가 아닐까 합니다. 외자유치를 통한 대규모 유상증자라고 해도 마찬가지 결론일 겁니다. 어차피 지배지분을 넘겨야 할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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