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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2018년은 국내 재벌그룹들이 순환출자 구조를 대거 해소한 시기로 기억됩니다. 대표적으로 현기증이 날 정도로 복잡한 거미줄 구조의 출자구조를 갖고 있던 롯데그룹이 롯데지주를 설립하면서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했고 농협, 현대백화점, 대림도 순환출자 고리를 완전히 해소했죠. 31개 상호출자제한 기업집단(자산총액 10조원 이상 기업집단) 중에서 8개 기업집단이 2017년 5월 현재 93개의 고리를 형성하고 있었는데 2018년 4월에는 4개 집단의 10개 고리만 남게 되었죠
현대차그룹이 현대모비스 분할 계획을 발표(2018년 3월)한 것도 이 때입니다. 계열사간 순환출자 관계를 끊고 현대모비스를 정점으로 하는 지배구조를 만들려고 했죠. 외부 자문기관들이 현대차그룹의 계획에 일제히 반대하면서 무산되고 말았지만요.
3년 만에 다시 현대차그룹이 지배구조 개편의 깃발을 올렸습니다. 현대엔지니어링 상장이 그 신호탄이죠. 현대엔지니어링 상장은, 정의선 회장이 보유 지분을 처분해 실탄을 확보하고, 향후에 그룹 지배구조의 정점이 될 현대모비스 지분을 취득해 총수로서의 지배력을 공고히 할 포석이라는 것입니다.
순환출자는A→B→C→A처럼 계열사끼리 꼬리에 꼬리를 물며 지분을 보유하는 걸 말합니다. 자산총액 10조원 이상의 기업집단은 상호출자(두 회사가 서로 지분을 보유하는 구조)가 금지되어 있으니까, 편법으로 피해간 게 순환출자인데, 과거 우리나라 재벌들의 전형적인 형태였습니다.
자본이 100억원인 A, B, C회사가 있고 A가 B를, B가 C를, C가 다시 A를 50% 소유하고 있다고 해 보죠. A의 최대주주는 낮은 지분율로도 세 회사를 완벽히 지배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세 회사의 자본의 합은 300억원이지만, 실제로는 150억원이 출자되었을 뿐입니다.
순환출자는 적은 자본으로 많은 계열사를 거느릴 수 있어 경제력 집중의 폐해를 만드는 것은 물론이고, 가공자본으로 동반 부실의 원인을 제공하기도 했습니다. 세계경영을 외치던 대우그룹이 망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로 꼽힙니다.
현대차그룹은 4개의 순환출자 고리를 갖고 있습니다. 4개 모두 현대모비스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현대모비스→현대차의 지분 관계가 현대차그룹 지배구조의 핵(core)인데, 여기에 기아차, 현대제철, 현대글로비스가 순환의 마지막 고리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보면 됩니다.
이 3개사가 보유한 현대모비스 지분을 처리하면 현대모비스→현대차→기아차, 현대모비스→현대차→현대제철, 현대모비스→현대차→현대글로비스, 현대모비스→현대차→기아차→현대제철 등 현대모비스를 꼭지로 하는 4개의 선형 지배구조가 생기게 되죠. 현대모비스가 지배구조의 꼭지점으로 제격인 이유입니다.
2018년에 재벌들이 앞다퉈 순환출자 고리를 해소한 이유가 있습니다. 공정거래법을 개정해 재벌들의 순환출자 고리 해소를 강제하려고 했었죠. 그 전까지는 자산 10조원 이상이 된 이후 순환출자가 새로 만들거나 강화하지 못하도록 했는데, 기존의 순환출자까지도 규제를 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법 개정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현대차그룹이 시간을 벌게 되었죠.
순환출자를 해소하는 그룹들이 가장 많이 채택하는 것이 지주회사 체제이죠. 이유가 있습니다. 순환출자보다는 덜하지만 지주회사 체제 역시 적은 자본으로 계열사를 거느릴 수 있는 아주 유용한 수단이거든요. 가공자본의 문제는 어느 정도 막을 수 있지만 경제력 집중의 폐해를 막을 수는 없습니다.
사실 지주회사 체제는 불법이었습니다. 1998년 외환위기가 터지기 전까지만 해도 말이죠. 그런데 외환위기로 수 많은 기업들이 도산하자, 1999년 지주회사 체제를 법으로 인정하게 됩니다. 정부가 지주회사를 허용해 줄 테니 순환출자는 하지 말자고 재벌들을 꼬신 겁니다. 지주회사가 좋은 지배구조라서가 아니라 순환출자보다는 덜 나쁘다고 본 것이죠
현대차그룹이 올해 지배구조를 바꾸려는 것도 이유가 있습니다. 공정거래법 개정으로 올해 하지 않으면 훨씬 많은 비용을 치르게 생겼거든요. 자발적으로 한다기 보다는 쫓겨서 한다고 보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우선 사익 편취 규제 대상이 확대됩니다. 지금은 총수일가 지분이 30%인 상장사(비상장사는 20%)의 경우 일감 몰아주기 규제 대상인데, 내년부터 20%(비상장사도 20%로 동일)로 강화됩니다. 현대차그룹에서 현대글로비스와 이노션이 새로 규제 대상에 포함됩니다. 현대글로비스와 이노션의 총수일가 지분은 29.9%입니다. 2015년 2월 시행된 사익 편취 규제를 피하기 위해 현대글로비스는 43.4%, 이노션은 100%였던 지분율을 낮춰 놓은 겁니다. 그런데 공정거래법이 개정되면서 다시 규제 대상이 됐죠.
규제를 피하기 위해서는 지분을 팔아 20% 아래로 낮추거나 계열사와의 내부거래를 줄여야 합니다. 그런데 현대차그룹의 종합물류 회사인 현대글로비스의 경우 현실적으로 내부거래를 줄일 수 없습니다. 지난해 매출이 12조원인데, 계열사에 대한 매출이 9조원에 이릅니다. 내부거래를 줄이라는 것은 회사 문을 닫으라는 소리와 다를 바 없죠.
그렇다면 정몽구 명예회장과 정의선 회장이 보유한 29.9%의 지분율을 낮춰야 합니다. 그런데 이 지분은 정의선 회장으로의 경영권 승계를 위한 지렛대가 되어야 할, 정의선 회장에게는 아주 소중한 것입니다. 그룹 지백조의 꼭지점이 될 현대모비스 지분을 취득할 재원이란 말입니다. 어차피 팔아야 한다면, 2018년 무산된 경영권 승계 작업을 다시 해야겠지요.
두 번째로 지주회사에 대한 자회사 의무 보유 지분율이 상향 조정됩니다. 현행법에서는 상장사 20%(비상장사 40%)인데, 내년부터 상장사 30%(비사장사 50%)로 바뀝니다. 자회사가 손자회사에 대해 의무적으로 보유해야 하는 지분율도 동일하게 강화됩니다. 12월 이전에 지주회사 체제로 바꾸면 자회사 지분 20%(상장사 기준)만 가지면 되는데, 늦어지면 10%를 더 확보해야 합니다.
현대모비스는 현대자동차 지분을 21.43%(지난해 말 현재) 보유하고 있습니다. 현행 지주회사의 자회사 의무 보유 지분율 기준을 만족합니다. 내년 이후에 현대모비스를 지주회사로 전환하려면 현대자동차 지분(지난해 말 현재 21.43%)을 추가로 8.57% 추가 취득해야 합니다. 지주사 전환을 안 한다면 모를까, 하겠다면 올해가 적기인 셈입니다.
현대차그룹은 현대모비스를 정점으로 하는 지배구조를 만들려고 합니다. 2018년 추진했던 계획과 같습니다. 시장의 예상도 그렇고, 현대차그룹도 부인하지 않습니다. 앞서도 살펴보았지만, 그룹의 중심인 현대차의 최대 주주가 현대모비스이기 때문이죠. 현대모비스가 현대차와 기아차를, 현대차와 기아차가 다른 계열사들을 지배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구조일 것입니다. 게다가 오너 일가의 지분율이 주력 회사 중 상대적으로 높고, 계열사들이 보유한 지분은 상대적으로 적습니다. 기아차와 현대제철이 보유한 지분만 해결하면 되죠.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정의선 회장이 보유한 현대모비스 지분이 고작 0.32%밖에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지분이 전혀 없다가 지난해 시장에서 매수해서 그나마 생긴 겁니다. 그룹의 입장에서는 정 회장에게 가장 유리한 지배구조 개편 계획을 마련해야 하는 숙제가 있는 셈이고, 정 회장 입장에서는 지분을 추가로 취득하기 위해, 그리고 정몽구 전 회장의 보유 지분을 상속 또는 증여받았을 때 내야 할 세금납부를 위해 실탄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그룹 입장에서 정 회장에게 가장 유리한 지배구조를 만들기 위해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될 회사가 현대글로비스입니다. 계열사 중 정 회장의 지분율이 가장 높죠. 현대글로비스 지분을 대가로 제공하고 현대모비스 지분을 가져오면 정 회장이 현금을 동원할 필요를 최소화할 수 있습니다. 현대글로비스의 기업가치가 높으면 높을수록 좋겠죠.
현대엔지니어링 상장으로 정 회장이 확보하게 되는 현금은 보조 역할을 하게 되겠죠. 현대글로비스 지분으로 충분하지 않다면, 정 회장이 추가로 현대모비스 지분을 매입해야 할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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