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재무제표를 읽는 사람들의 기사는 작성 후 최소 1주일 경과된 시점에 무료 공개되고 있음에 유의 하시기 바랍니다.

그거 아십니까? 우리나라 지주회사 제도는 대주주에게 아주 유리하게 되어 있습니다. 지주회사는 말 그대로 다른 회사를 지배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여기서 지배라는 것은 100% 지분, 즉 완전한 소유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선진국의 경우 지주회사의 자회사는 비상장사이고, 지주회사만 주식시장에 상장되는 것이 상식입니다.


정부 주도로 제도가 만들어진 우리나라 지주회사는 재벌그룹에게 순환출자를 끊는 대신 주는 당근의 성격을 갖고 있기 때문에, 매우 느슨한 지배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현재 기준으로 자회사 지분 40%, 상장 자회사면 20%의 지분만 가져도 인정해 줍니다. 지분을 일부만 보유해도 자회사로 인정을 해주니, 지주회사는 남는 자원으로 더 많은 자회사 또는 손자회사를 거느릴 수 있습니다. 적은 자본으로 많은 기업을 거느릴 수 있으니 부의 집중을 초래할 수 밖에 없습니다.


지분율 20%이면 회계기준상 자회사로 인정받기 어렵습니다.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지배력을 입증해야 합니다. 다른 증거 없이 지분율 만으로도 지배력을 인정받으려면 50%는 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지주회사의 연결재무제표를 보면 연결 대상에서 빠져 있는 지주회사법상 자회사가 부지기수입니다. 지분율 20~50% 사이에 있는 자회사들이 관계회사로 분류되기 때문이죠. 그러니 지주회사의 연결재무제표가 실질을 제대로 반영하고 있다고 볼 수 없습니다.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할 때 많이 활용되는 인적분할은 대주주의 지배력 강화 수단으로 많이 활용되죠. 이건 이미 여러 사례가 있으니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을 것입니다. 물적분할은 지주회사의 자금조달 수단으로 활용이 되죠. 모회사가 특정 사업부문을 물적분할하게 되면, 그 사업부문은 모회사의 100% 자회사가 되는데, 우리나라 지주회사 제도상 지분을 100%까지 보유하고 있을 필요가 없으니, 상장사면 20%, 비상장사면 40%의 지분만 남기고 나머지 지분을 매각해 현금화할 수 있죠.


지난 글에서 전한 바와 같이 SK그룹의 경우 중간 지주회사 성격을 갖고 있는 SK이노베이션과 SK텔레콤은 사업회사이면서 여러 비상장 자회사를 거느리고 있고, 그 자회사들의 지분을 거의 100% 보유하고 있습니다. 인적 분할을 통해 대주주의 지배력 강화를 시도할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구주 매출 방식으로 자회사를 주식시장에 상장시켜 막대한 현금을 확보할 기회도 갖게 됩니다.


지난해 이후 SK바이오팜, SKIET, SK바이오사이언스 등 SK그룹 계열사들이 기업공개(IPO)시장에 단골 손님으로 등장하는 것은 이런 조건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죠. 아직도 상장 후보들이 쌓여 있습니다. 이미 소문이 돌고 있는 SK플라즈마를 비롯해 SK루부리컨츠, SK E&S, SK팜테크, SK매직, 11번가, 티맵 등 아주 많습니다. SK텔레콤은 계열사 IPO를 전담하는 조직을 신설해 재무부서와 별도로 운용하기로 했죠. … SK그룹 계열사의 상장 행렬이 어디까지 이어질지 모르겠습니다.


기업이 상장하는 목적은 무엇일까요? 여러 가지 목적이 있겠지만, 그중 첫째는 자금조달입니다. 상장하는 기업의 입장에서 보면 신주 발행을 통한 투자자금 확보가 첫번째이고, 주주의 입장에서 보면 구주 매출을 통한 투자 회수가 첫번째 목적이죠. SK이노베이션이 SKIET를 공개하고, SK루브리컨츠의 소수 지분을 매각(프리 IPO)하는 이유도 당연히 자금 확보가 첫번째 목적일 겁니다.



그렇다면 SK이노베이션은 왜 이 시점에 거액의 자금이 필요한 것이고, 대체 얼마나 많은 자금을 모으려는 걸까요. SK루브리컨츠 지분 매각설이 보도되었을 때 회사측이 내놓은 이유는 '재무건전성 확보'와 '신규사업 투자재원 마련'이었습니다.


SK이노베이션(개별)의 부채비율은 올해 3월말 현재 33.66%, 차입금의존도는 14.13%입니다. 2018년 이후 비율이 추세적으로 상승하고 있는 것이 부담스럽습니다만, 수치 자체가 그리 높은 편은 아닙니다. 지표만 보면 재무건전성 확보를 위해 자회사를 줄줄이 상장시키거나 팔아야 할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런데 재무건전성과 관련해 아주 큰 이슈가 하나 있죠. 바로 LG그룹과의 배터리 분쟁입니다. LG화학은 미국 국제무역위원회(ITC)에 SK이노베이션이 배터리 영업비밀을 훔쳤다고 소송을 제기했고, 올해 2월 미국 ITC는 최종 판결을 통해 LG화학의 손을 들어주었죠. 이로 인해 SK이노베이션은 미국 내에서 배터리 생산과 수입을 10년간 금지될 위기에 놓였고, 결국 지난 5월15일 특허 및 영업비밀과 관련한 모든 책임을 면제받고 향후 10년간 쟁송을 하지 않는 조건으로 LG에너지솔루션에 일시금 1조원과 총 1조원 한도의 로열티를 지급하는 합의를 해야 했습니다.


SK이노베이션은 LG에 최대 2조원을 지급해야 하고 그 중 1조원은 일시금으로 줘야 하는 처지인데요. SK이노베이션에는 그 만한 현금이 없습니다. 연결기준으로는 3월말 현재 약 6조7000억원 상당의 현금 유동성이 있지만, 대부분 자회사에 있는 돈이고, SK이노베이션에는 탈탈 털어도 5000억원 정도 입니다. 배터리 설비확대에 매년 큰 돈을 투자해야 하는 입장에서 보유 현금을 전부 소진할 수는 없는 일이죠.


물론 SK이노베이션에게 1조원이 마련하지 못할 큰 돈은 아닙니다. 자회사들에게 배당을 듬뿍 받아도 되고, 자산 중 일부를 매각할 수도 있습니다. 자본시장에서 신용도가 있는 기업이니 회사채 발행으로 1조원을 조달할 수도 있죠.


재무건전성 확보보다는 신규사업을 위한 투자재원이 훨씬 설득력 있습니다. SK이노베이션은 지난해 글로벌 전기차 배터리 시장에서 약진했지만, 국내 경쟁사인 LG와 삼성 역시 시장점유율이 크게 높아지기는 마찬가지였죠. SK이노베이션은 여전히 국내 3등이고, LG와의 격차는 좁혀지지 않았습니다.



SK이노베이션이 자회사 매각의 이유로 신사업 투자재원 확보를 들고 있지만, 여기서 신사업 역 배터리사업 확대로 보입니다. 2018년 이후 12조4568억원의 배터리 설비투자를 진행 중인데, 올해 3월까지 6조3614억원을 지출해 이제 겨우 반환점을 돌았습니다. 향후 투자 역시 배터리와 배터리 소재사업이 중심이죠. 김준 사장은 지난달 1일 'SK이노베이션 파이낸셜 스토리' 행사에서 향후 5년간 30조원의 투자 계획을 밝혔는데, 핵심은 배터리와 배터리 핵심 소재인 리튬이온전지 분리막(LiBS)이었습니다.


특히 배터리 생산능력을 현재 40GWh 수준에서 후년인 2023년 두배 이상인 85GWh, 2030년에는 500GWh가 될 것으로 예상했죠.


SK이노베이션이 자회사 배당금을 포함해 1년에 창출하는 현금흐름이 지난해 기준 1조8650억원입니다. 연간 2조원이라고 봤을 때 15년을 벌어야 30조원이 됩니다. 배터리 사업이 커지면 현금흐름 창출은 더 커지겠지만, 지금으로서는 자체적으로 감당할 수준의 투자규모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투자재원 마련을 위한 특단의 대책이 있어야 하는데, 그에 가장 근접한 것이 자회사의 매각이나 상장일 것입니다. SK이노베이션의 장부상 총 자산이 지난해말 기준 17조원인데, 그 중 무려 14조원이 종속회사 또는 관계회사 지분입니다. 자산의 대부분이 계열사 주식이니, 큰 돈을 일거에 마련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수단은 바로 그 주식들이 되는 게 당연하죠.


김준 사장은 파이낸셜 스토리 행사에서 아주 웅장한 포부를 밝혔죠. 단지 배터리 사업을 키우겠다는 정도가 아니라 '탄소에서 그린으로'의 사업 대전환을 예고했습니다. 배터리를 제외하고 보면, SK이노베이션의 주력 사업은 석유사업과 석유화학사업이죠. 탄소 중심의 사업입니다.


탄소에서 그린으로 사업을 바꾼다고 해서 석유를 정제 및 유통하는 SK에너지나 플라스틱을 생산하는 SK종합화학을 당장 팔아 치운다는 뜻은 물론 아닙니다.하지만 이 기업들이 현재 하고 있는 사업의 중요성은 매우 약해질 수 밖에 없죠. 그린 전략의 궁극적인 목표가 화석연료 사용에 대한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는 것이라고 김준 사장은 말했습니다. SK종합화학을 중심으로 폐플라스틱으로 다시 석유를 만드는 '도시 유전'사업 모델을 도입한다고 하고, SK에너지는 전기와 수소를 생산 및 유통하는 회사로 탈바꿈 시킨다고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기존 사업에 대한 투자는 더 이상 하지 않아야 하고, 사업 전환을 위한 투자가 새로 필요하게 되겠죠. 그 투자 재원은 각 계열사가 자체적으로 마련해야 할 겁니다. SK이노베이션은 그럴 만한 자금 여유가 없을 테니까요. 결국 자회사는 자회사 나름대로 신주 발행을 겸한 기업공개에 나서야 하는 입장이고, 필요하다면 기존 자산의 축소(매각)도 해야 할 겁니다. SK에너지가 전국의 주유소를 유동화하는 이유 역시 '돈'이 필요하기 때문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