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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화건설은 2002년 ㈜한화로부터 물적분할된 회사입니다. 한화그룹이 사업구조조정을 하겠다며, ㈜한화에서 한화건설과 한화기계를 물적분할해 자회사로 두었죠. 업종별 전문경영을 통해 기업가치를 높이겠다는 명분이었습니다. 우연의 일치인지 모르겠지만 한화그룹은 2002년에 대한생명(한화생명의 전신, 이하 한화생명으로 통일)을 인수합니다. 그리고 대한생명 지분을 그룹 내에서 재정리하는 데 한화건설이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죠.
한화그룹은 일본의 오릭스, 호주의 맥쿼리 보험과 컨소시엄을 이루어 한화생명 지분 51%를 예금보험공사로부터 1조6150억원에 사들입니다. 처음 계약한 건 8236억원이었는데 예보가 계속 협상해 가격을 올려 받았죠. 나중에 예보가 이 매매계약의 무효를 주장하며 수 년간에 걸친 법적 공방을 하는 등 한화그룹의 한화생명 인수는 말도 많고 탈도 많았습니만 뒷 이야기로 남겨두기로 하죠.
한화컨소시엄에 들어간 계열사는 한화석유화학, 한화종합화학, 한화유통, 한화증권 4개사였습니다. 이들 계열사가 컨소시엄 지분의 63%, 오릭스가 30%, 맥쿼리보험이 7%를 담당했습니다. 한화생명 인수 당시에는 한화㈜와 한화건설이 참여하지 않았죠. 하지만 인수 직후 한화생명의 지분은 한화㈜로 헤쳐 모입니다.
한화㈜는 한화생명 지분을 매수하기 위해 보유하고 있던 자산을 대대적으로 매각합니다. 대부분 계열사 주식이었죠. 2013년에만 한화석유화학(1308억원), FAG한화베어링(1119억원), 한화포리마(61억원), 한화투어몰(8000만원)을 포함해 2500억원 이상의 보유 지분을 처분합니다. 주식 매각으로 확보한 현금은 한화생명 지분을 컨소시엄 참여 회사로부터 사들이는 데 쓰이고요.
한화㈜의 지분 매각과 한화생명 지분 인수는 2003년에 시작돼 2004년까지 계속 이어졌는데요. 한화종합에너지 주식을, 한화유통에 900억원, 한화종합화학에 597억원에 팔았고, 한화석유화학 주식을 한화건설로 299억원에 팔았죠. 한화포리머 주식은 한화종합화학에(61억원), 한화종합에너지 주식을 한화석유화학으로(981억원), 한화기술금융 주식을 한화증권에(29억원), 한화역사 주식을 한화국토개발에(173억원), 에이치팜 주식을 한화유통에(197억원), 자기주식을 한화증권에(303억원) 파는 식이었습니다. 한화석유화학 주식을 장내에서 시간외 대량 매각 방식으로 220억원에 팔기도 했군요. 한화㈜는 이 돈으로 한화생명 주식을 한화증권에서 854억원어치, 한화유통에서 998억원어치, 한화종합화학에서 1362억원어치, 한화석유화학에서 1392억원어치 사들입니다.
한화건설은 ㈜한화로부터 한화석유화학 지분을 매입하는 것으로 역할이 끝난 게 아니었습니다. 보유하고 있던 Hanwha International 지분 100%를 한화종합화학에 393억원을 받고 팔고, 2003년 8월에 한화생명 보통주 2198만주를 520억원에 매입하죠. 한화건설이 한화생명의 주주가 되는 순간입니다. 공시로는 520억원인데, 당시 분기보고서에는 취득가액이 650억원으로 나오더군요.
한화건설은 그해 12월에도 맥쿼리 보험으로부터 한화생명 보통주를 610억원에 매입하고, 2007년에는 ㈜한화로부터 2063억원어치의 한화생명 지분을 추가로 삽니다. 이때 한화생명의 최대주주가 ㈜한화에서 한화건설로 바뀝니다. 지금은 한화건설이 25.09%, ㈜한화가 18.15%의 한화생명 지분을 나누어 갖고 있습니다.
자본시장 미디어 더벨에서 보도된 ㈜한화의 한화건설 합병설이 사실이라면, 한화건설은 분할된 지 20년 만에 다시 ㈜한화로 흡수될 운명입니다. 한화건설은 코로나19 이후 조금 주춤하기는 하지만 연매출 3조원 이상을 할 수 있는 회사이고, 이익도 꾸준히 나고 있는데요. 합병하려는 이유는 아무래도 한화생명 지분 때문이겠죠. 그룹의 지배구조를 지주회사 체제로 바꾸고, 한화생명을 계열 분리하거나 금융계열사를 중간지주회사로 묶을 것으로 시장에서는 보고 있다고 합니다. 합리적인 예상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한화생명 지분을 ㈜한화로 모을 생각이라면, 꼭 합병을 하지 않아도 되잖아요. 한화생명 지분을 한화건설에 제 값을 쳐주고 사가면 될 일입니다. 그렇게 할 수 없는 다른 사정이 있는 걸까요?
아무래도 그 이유는 한화생명에서 찾아야 할 것 같습니다. 보험사의 자본적정성을 나타내는 지급여력비율(RBC비율)이라는 게 있는데요. 보험회사에 내재된 각종 리스크 양을 산출하고 이에 상응하는 자본을 보유하도록 하는 제도입니다. 보험업법상 기준은 100%이지만 정부가 권고하는 수준은 150%입니다. 이 비율이 낮아지면 보험사는 증자나 다른 자본증권 발행을 통해 자본확충을 해야 합니다.
지난해와 올해 보험사들의 지급여력비율이 큰 폭으로 떨어지고 있는데요. 한화생명은 다른 보험사에 비해 지급여력비율이 낮습니다. 올해 3월말 현재 160%로 정부의 권고 수준에 근접해 있습니다.
지난 달 신용평가업계는 한화생명의 보험금 지급능력을 AAA 등급에서 AA+로 하향조정했습니다. 지급여력비율 하락이 직접적인 이유가 되었죠. 한화생명은 자본확충을 위해 이달 17일 3000억~5000억원의 후순위채 발행을 앞두고 있습니다. 한화생명의 자회사인 한화손해보험의 지급여력비율도 올해 3월말 122.8%로 떨어져 지난달 1500억원의 신종자본증권을 발행한 바 있죠.
하지만 이걸로 부족할 수 있습니다. 내년부터 보험사에 적용되는 국제회계기준(IFRS 17)이 도입됩니다. 보험부채를 시가(현재가치)로 평가하는 게 골자인데요. 이에 따라 보험사의 재무건전성이나 손익구조의 변동성이 급격히 커져 재무구조나 수익성에 부정적인 영향을 초래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IFRS 17 도입과 더불어 새로운 지급여력제도(K-ICS)가 추진되고 있어 보험사들이 대대적인 자본확충에 나설 것으로 보입니다. 신종자본증권은 물론이고, 자산매각이나 증자 등이 속출할 것 같습니다. 한화생명은 대규모 자본확충이 필요할 것으로 예상되는 대표적인 보험사 중 하나지요.
자본확충을 위해 증자를 한다고 치면 대주주 역할이 중요한데요. 한화건설은 한화생명을 지원할 여력이 충분해 보이지 않습니다. 보유 유동성도 크지 않고 비상장사인데다 신용등급(A-)도 높은 편이 아니어서 대규모 자금조달에 어려움이 있습니다. 한화생명에 비하면 한화건설은 한없이 작은 회사죠.
결국 그룹의 지주회사 격인 ㈜한화가 나서 주어야 하는데요. 그렇다고 한화건설이 보유한 한화생명 지분을 ㈜한화가 현금을 주고 매입하는 건 서로 곤란합니다. 한화생명의 시가총액이 7일 현재 2조2000억원 정도 됩니다. 한화건설이 보유한 지분을 시가로 치면 약 5500억원 가량 되겠군요. 시가로 사온다고 쳐도 5500억원을 한화건설에 주고 한화생명 지분을 사온 후 한화생명의 자본확충을 지원하려면 ㈜한화로서는 이중 부담입니다.
게다가 한화생명 지분을 매매하게 되면 한화건설에 엄청난 손실이 발생합니다. 3월말 현재 한화건설이 보유한 한화생명 지분의 장부가액이 2조2600억원에 달합니다. 시가로 사고팔 경우 한화건설은 1조7000억원에 달하는 천문학적 손실을 입게 되죠. 한화건설의 자본총액이 3월말 현재 1조3280억원이거든요. 한화생명 지분을 파는 순간 자본잠식에 빠지게 됩니다.
한화건설 흡수합병은 묘수가 될 수 있습니다. ㈜한화가 돈 한푼 안 쓰고 한화생명 지분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한화건설이 자본잠식에 빠질 필요도 없죠. 게다가 ㈜한화에는 대규모 자본조달을 할 수 있는 수가 남게 됩니다. 흡수합병한 한화건설을 다시 분할(당연히 한화생명 지분은 제외)한 뒤에 자금이 필요한 시기에 한화건설을 상장(IPO)할 수 있습니다. 한화생명 자본확충에 필요한 대규모 자금조달을 할 수 있는 ㈜한화의 카드지요. 그 카드를 꺼낼 지 말 지는 ㈜한화의 마음에 달린 일이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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