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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권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자본과 부채의 두 얼굴을 가진 신종자본증권이 일반기업에 의해 발행된 건 2012년 부터입니다. 첫 발행은 CJ제일제당 인도네시아 법인에 의해 2000억원의 규모로 발행되었는데, 사모 방식이어서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이어 두산인프라코어가 밥캣 인수에 참여한 재무적 투자자(FI)의 보유 지분 인수를 위해 5억 달러의 외화 신종자본증권을 공모로 발행하면서, 과연 자본으로 인정해도 되는 것인지를 놓고 상당한 논란이 있었죠. 금융감독원은 자본으로 볼 수 있다는 유권해석을 내렸지만 금융위원회에서는 자본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입장이었습니다. 회계기준원에서도 결론을 내지 못해 결국 국제회계기준위원회(IASB)에 해석을 요청했죠. IASB는 발행한 지 7개월 후인 2013년 5월 신종자본증권을 자본으로 판단한다는 입장을 회계기준원에 전달했습니다.


은행이나 보험사 등 금융회사가 발행하는 신종자본증권은 자본으로 인정받기 위해 비교적 엄격한 발행조건을 만족(자본적정성이 일정 기준을 넘을 것, 스텝업 범위가 1%포인트 또는 발행 당시 가산금리의 50% 이내일 것 등)해야 하고, 콜옵션 행사로 조기상환을 하기 위해서는 더욱 엄격한 조건(자본성이 같거나 더 강한 수단으로 대체될 것, 금리가 발행 당시보다 현저하게 하락할 것 등)이 요구되죠.


하지만 일반기업의 신종자본증권에 대해 요구되는 조건은 훨씬 헐겁습니다. 회사 청산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이자 지급과 상환의 권리가 전적으로 발행사에 있으면 됩니다. 조기상환 또는 상환을 강제할 수 있는 권리가 명시적으로 투자자에게 있지 않으면 된다고도 볼 수 있죠.


두산인프라코어가 2012년 발행한 신종자본증권이 자본성 논란에 휩싸인 이유는 여럿이 있는데요. 회사가 중요한 위기에 놓였을 때 보통주 자본에 준하는 손실완충 역할을 해야 자본성이 있다고 볼 수 있는데, 두산인프라코어의 신종자본증권은 상환순위가 '선순위'로 규정되어 있었습니다. 일반 회사채와 동순위로 상환을 받을 권리가 있었죠. 게다가 5년 후 콜옵션을 행사하지 않으면 금리를 무려 5%포인트나 올려주는 스텝 업 조건이었습니다.


결정적으로 두산인프라코어는 투자자에게 신종자본증권에 대한 풋옵션(조기상환을 요청할 수 있는 권리)을 제공하지 않았지만, 해외에 특수목적회사(SPC)를 설립해, 투자자가 그 SPC에 행사할 수 있는 풋옵션을 우회적으로 제공했습니다.



발행 5년 후 투자자가 SPC에 풋옵션을 행사하면, SPC는 신용공여은행에서 대출을 받아 신종자본증권을 매입하고, 두산인프라코어에 신종자본증권을 주식으로 교환해 달랴고 청구할 수 있는(주식교부청구권)을 주는 구조였죠. SPC는 대출금을 갚는 대신 영구채와 주식교부청구권을 신용공여 은행에 넘기게 될 테니 두산인프라코어는 결국 콜옵션을 행사해 신종자본증권을 조기상환하거나 주식을 발행해 신종자본증권과 맞바꾸는 두 가지 선택지를 갖게 되는 셈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SPC가 두산인프라코어 대신 신종자본증권을 갚는 구조인데, SPC가 지분구조상두산인프라코어의 자회사는 아닌 별개 회사이기 때문에 자본으로 볼 수 있다는 논리였던 겁니다. 이렇게 구조를 변형시켜 회계적으로는 신종자본증권을 회계상 자본으로 인정받는 데는 성공했습니다. 회계상 부채비율이 하락하는 등 재무개선이 이루어진 것 같은 효과를 보았죠.


하지만 실질적인 자본의 역할을 하지는 못했습니다. 두산인프라코어가 5년 후인 2017년 10월 신종자본증권 5억 달러 전액에 대해 콜옵션을 행사해 조기상환해 버렸으니까요. 5년간 자본행세를 하며 살았지만 결국 3.328%의 5년 만기 채권으로 생을 끝낸 신종자본증권입니다.


두산인프라코어의 사례를 계기로 신종자본증권은 국내 일반기업의 자본확충 수단으로 각광을 받습니다. 사실상 콜옵션 행사기한이 실질 만기인 채권이면서 회계상으로는 부채비율을 낮추어주는 자본 아닌 자본이니까요. 자본잠식에 빠진 기업이 사모로 신종자본증권을 발행하면, 사실상은 차입을 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쉽게 자본잠식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국내에서 원화로 발행된 일반기업의 신종자본증권은 예외 없이 기관투자가를 대상으로 사모로 발행됩니다. 채권 투자자는 물론 주주에게도 투자판단에 매우 중요한 정보이지만 증권신고서를 제출하지 않기 때문에 정보를 찾기가 어렵습니다. 정보의 사각지대에 있죠. 사실상 사업보고서나 분기보고서를 뒤져보는 수 밖에 없습니다.


자신이 투자한 기업이 신종자본증권을 발행해 재무구조가 좋아졌다고 안심하면 안됩니다. 콜옵션 행사시기가 오면 거의 전부 조기상환이 이루어지는데, 대부분 일반 회사채를 발행해 상환하기 때문에 재무구조가 급격하게 악화될 수 있습니다. 조기상환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것도 문제입니다. 금리조건이 분명히 매우 나빠지게 될 테니까요.



금융감독원이 2018년에 일반기업의 신종자본증권 발행 현황을 조사한 적이 있는데요. 2012년부터 2017년까지 44개사에 의해 총 52차례의 발행이 이루어졌고 발행규모는 12조원에 달했습니다. 아마 2020년 코로나 사태로 2년간 초저금리 상황이었으니 새로 신종자본증권을 발행한 기업들이 꽤 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일반기업의 신종자본증권은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 조기상환이 이루어졌고, 콜옵션 행사시기가 5년보다 짧은 경우도 있었습니다. 가장 많은 신종자본증권을 발행한 기업은 대한항공인데, 2013년에 2100억원, 2015년 3억달러, 2018년 3억달러, 2018년 2100억원,  2018년 1600억원, 2019년 2000억원, 2019년 1800억원, 2020년 3000억원으로 거의 매년 발행을 해 왔는데요. 2013년 처음 발행한 건 5년 후 콜옵션을 행사해 갚았고, 이후에는 2년 또는 3년 후 콜옵션을 행사하는 조건이었습니다. 사실상 2년 또는 3년마다 신종자본증권을 차환발행해 왔던 셈이죠.


마지막 발행한 2020년 3000억원의 신종자본증권은 전환사채로 발행이 되었는데요. 발행 2년 후 2.50%포인트의 추가 가산금리가 붙게 되어 있었고, 그 후에도 매년 0.50%포인트씩 금리를 더 주는 조건이었습니다. 대한항공은 발행 2년 후, 그 후에는 매 이자지급기일이 도래하는 3개월마다 콜옵션을 행사할 수 있었습니다. 사실상 2년이 실질 만기인 채권인 셈이죠. 이 전환사채는 올해 3분기 전액 주식으로 전환되어 이제 대한항공이 부담하고 있는 신종자본증권은 전혀 없습니다.


코로나 사태로 재무상황이 악화된 기업에게 신종자본증권은 아주 매력적인 자본확충수단이었죠. 대표적으로 저가항공사(LCC)인 제주항공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2020년에 두 차례에 걸쳐 464억원,  2021년에 한 차례 300억원, 올해 5월에 두 차례 790억원 등 총 1554억원 어치의 신종자본증권을 발행했습니다. 제주항공이 미상환한 회사채 중 하나를 제외하고 모두 신종자본증권이죠. 전액 자본잉여금으로 분류된 이 신종자본증권을 포함한 제주항공의 올해 9월말 현재 자본총액은 692억원입니다. 신종자본증권이 회계상 자본이 아닌 부채로 분류된다면, 순자본이 마이너스인 완전 자본잠식 상태가 됩니다. 제주항공은 발행내역 외에 조기상환조건 등 자세한 정보를 발행 공시는 물론 사업보고서나 분기보고서를 통해서도 제공하지 않았습니다.


코스닥기업들도 신종자본증권을 발행합니다. 헬스케어와 게임사업을 ㈜아이톡시를 예로 들 수 있습니다. 현재 상장폐지 위기에 몰려 거래정지된 곳으로, 과거 이모션이라는 상호를 쓰다가 예당온라인, 와이디온라인을 거쳐 2020년부터 지금의 상호를 쓰고 있습니다. 매년 적자를 면치 못하고 있는 아이톡시는  9월말 현재 자본총액이 61억원으로 자본금 99억원보다 적어 부분 자본잠식상태인데요. 전환사채를 만기 30년짜리 신종자본증권으로 발행해 회계상 자본을 늘려 놓았습니다.


9월말 현재 자본으로 분류된 신종자본증권이 80억5000만원으로 자본총계를 넘어서지요. 신종자본증권을 제외하면 순자산이 마이너스가 되는 셈입니다. 코스닥기업들이 전환사채를 발행하면 전환권 대가만 자본으로 분류되고 사채부분은 부채로 분류되었다가 전환권이 행사되면 나머지 사채 부분도 자본이 되잖아요. 그런데 아이톡시처럼 전환사채를 신종자본증권으로 발행하면 처음부터 전액 자본으로 분류됩니다. 표면상 만기만 30년일 뿐이지 발행일부터 30년 후까지 언제든지 전환권을 행사할 수 있는 조건이니 투자자에게는 다른 전환사채보다 훨씬 더 유리한 조건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