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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체 후공정업체였던 에이티세미콘이 이달 초 본업인 반도체 패키징사업을 에이팩트에 양도했죠. 이미 지난 5월에 자본시장미디어 더벨에 보도된 대로 거래상대는 반도체 후공정 전문업체 에이팩트이고, 매각 이유는 재무구조 개선과 신사업 발굴이라고 합니다. 본업을 팔았으니 당연히 새로운 사업을 해야겠죠. 에이티세미콘은 계약금 20억원을 8월말에 받고 잔금 700억원을 지난달 말 현금으로 수령했습니다. 언론에서는 에이티세미콘이 시가총액 이상의 유동성을 확보했고 신사업으로 2차전지를 선택했다고 보도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에이티세미콘은 지난달 12월 임시주주총회를 열어 반도체패키징사업 양도를 승인하고 2차전지사업을 사업목적에 추가했습니다. 새로 추가한 사업은 전해액 제조·판매업, 2차전지 제조업, 2차전지 및 전자부품 유통업, 2차전지 소재의 제조 및 판매업 등입니다. 그 밖에 2차전지 관련 산업설비, 건물, 구축물, 토목시설의 설계 및 시공사업, 2차전지 관련 산업기계제작, 2차전지 관련 폐 원료 중간재활용업 등 연관 사업들을 총망라했습니다. 정말 의지를 갖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엔터테인먼트업, 광고대행업 등도 추가했습니다. 사업목적을 늘리는 김에 염두에 두고 있는 사업을 전부 넣은 것 같습니다.
패키징사업이 에이티세미콘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적입니다. 전체 매출액에서 자회사 리더스기술투자를 제외하면 사실상 모든 매출이 패키징사업에서 나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전체 자산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그렇습니다. 9월말 기준 2086억원의 자산총액 중 1072억원이 매각 예정인 패키징사업부문 자산에 속합니다. 패키징사업을 매각하고 나면 에이티세미콘에 남는 건 현금과 금융자산 그리고 계열사 지분이 전부입니다.
본업을 매각한다는 건 회사의 운명을 건 대단한 도전입니다. 그 동안 전혀 하지 않던 완전히 새로운 사업에 진출하기 위한 결정이니 모험에 가까운 도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상당기간 사업 공백이 불가피하고, 성공이 보장된 것도 아니니까요. 재무적으로 여유가 많은 기업이었다면, 본업을 영위하면서 신사업을 키워 순탄한 전환을 시도했을 겁니다. 에이티세미콘은 신사업이 결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본업 매각을 결정했고, 신사업의 재원이 본업의 매각자금이니 미리 준비할 수도 없습니다. 실패하면 회사는 중대한 위험에 빠집니다.
에이티세미콘의 본업은 최근 몇 년 실적이 좋지 않았습니다. 매출은 정체되었고 4년 연속 적자를 기록했습니다. 영업현금흐름은 플러스(순유입)이었지만 자본적 지출을 충당하기에는 부족했습니다. SK하이닉스를 주요 고객으로 두고 있지만, 반도체산업이 슈퍼사이클에 있던 시절에도 에이티세미콘은 쪼들렸습니다. 에이티세미콘은 반도체 후공정업에서 경쟁력이 있는 업체는 아니었던 겁니다.
그래서일까요? 에이티세미콘은 2020년부터 부쩍 부업(?)에 신경을 썼습니다. 바이오 자회사(에이치젠바이오, 에이티팩토리)를 설립했고, 화장품 관련 회사(코스모파마)의 지분을 취득했습니다. 지난해에는 전환사채 발행으로 마련한 돈으로 신기술금융회사인 리더스기술투자를 인수하는데 창사이래 최대 투자(340억원)를 하기도 했습니다.
2019년말부터 올해 초까지 유상증자와 전환사채 발행으로 총 950억원의 뭉칫돈을 조달했습니다. 시설자금 80억원, 운영자금 210억원, 채무상환 210억원 그리고 가장 많은 450억원은 타법인 주식 등의 취득, 즉 M&A 목적의 자금이었습니다. 물론 가장 많은 돈이 투입된 건 리더스기술투자 인수입니다.
올 들어 에이티세미콘의 사정은 더욱 악화됐습니다. 적자의 골은 깊어졌고 현금흐름 창출능력은 크게 약화됐습니다. 이달 초 3분기 보고서가 공개되었는데요. 지난해 동기 178억원(개별 기준)이던 순손실이 439억원으로 크게 늘었습니다. 계속사업손실이 128억원에서 150억원으로 커졌고, 중단사업인 패키징사업에서 지난해 동기 50억원 손실을 봤는데, 올해 3분기까지 289억원의 손실을 기록했습니다. 패키징사업을 매각하기로 하면서 그 동안 쌓인 손실을 한꺼번에 인식했나 봅니다.
빚으로 인수한 가장 큰 자회사 리더스기술투자는 효자가 되지 못했습니다. 수익(매출액)이 올 들어 9개월동안 140억원인데, 영업손실이 188억원, 순손실이 198억원으로 매출액보다 손실이 컸습니다. 리더스기술투자의 자회사인 투자조합들도 모조리 적자를 기록했습니다. 바이오 자회사인 에이티팩토리와 에이치젠바이오는 매출 없이 손실만 기록했고, 자산관리 회사인 에이티에이엠씨 역시 비용만 발생했습니다.
아마 올해 3월쯤 에이티세미콘의 실질적인 주인인 김형준 대표는 '이대로는 답이 없다'고 느꼈는지 모릅니다. 이 당시 아주 중요한 결정을 하거든요. 바로 대대적인 자금조달입니다. 에이티세미콘 이사회는 3월 10일 101억원의 제3자배정 유상증자와 무려 2000억원에 달하는 사채 발행(전환사채 1000억원, 신주인수권부사채 1000억원)을 의결합니다. 300억원 규모의 자기전환사채(조기상환 후 회사가 보유하고 있는 전환사채)의 재매각 계획도 세웁니다.
에이티세미콘이 사실상 회사의 전부라고 할 수 있는 본업을 매각하고 받은 돈이 720억원, 16일 현재 시가총액이 900억원대입니다. 2400억원이면 에이티세미콘을 완전히 다른 회사로 만들어 놓을 정도의 거액인 셈이죠. 그 동안 했던 M&A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빅 피쳐(Big picture)가 있었다는 얘기죠.
재무제표를 읽는 사람들은 당시 '에이티세미콘의 리더스기술투자 인수, 그 이후'라는 기사에서 자금조달이 완료되면 에이티세미콘의 최대주주가 교체되고 사업에도 큰 변화가 발생할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설마 본업을 버릴 줄은 몰랐죠. 그 자금조달이 완료되는 시점은 8월이었습니다. 에이팩트와 패키징 사업에 대한 양수도계약을 체결한 것도 8월입니다. 우연의 일치일까요?
3월10일의 2400억원 자금조달 계획은 예정대로 이루어지지 못합니다. 수 차례에 거쳐 연기되었고 인수자도 바뀝니다. 101억원의 유상증자와 2000억원의 발행 사채 인수자는 당초 ㈜인플루언서랩이라는 정체모를 법인이었는데, 4월 납입하기로 했던 유상증자는 지난달 27일 비상장 화장품업체인 ㈜지피클럽과 제이에스엘케이조합이 각각 75억원과 26억원을 납입하면서 완료됐고, 1000억원의 전환사채는 뉴아시아알파조합, 1000억원의 신주인수권부사채는 브이티엠조합이 이달 25일 납입할 예정입니다. 원래는 5월말이 납입 예정일이었죠. 또 300억원의 자기전환사채 매각도 5월말 잔금이 치러지기로 되어 있었는데 역시 이달 25일로 연기되었습니다. 매입자는 ㈜아임존이라는 곳입니다.
그 사이에 지난해 12월 결정됐던 80억원의 제3자 배정 유상증자가 규모를 65억원으로 줄여 지난 8월에 이루어졌습니다. 김형준 대표가 단독으로 신주를 인수하기로 했는데, 김대표가 100% 지분을 보유한 더에이치테크가 대타로 나섰습니다. 이로써 김형준 대표는 더에이치테크 보유분을 포함 12.23%의 지분을 확보하게 됐고, ㈜지피클럽은 10.36%로 2대 주주가 되었습니다. 자금조달 계획이 바뀌면서 최대주주 변경은 이루어지지 않았죠.
에이티세미콘은 본업을 매각하면서 매각자금으로 신사업에 진출한다고 했지만, 신사업 진출 자금의 메인은 본업 매각자금이 아니라 3월 10일 계획된 2400억원 규모의 조달 계획이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오는 25일 2300억원의 사채발행 자금이 유입되면 신사업에 대한 투자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겠죠.
주목해야 할 이슈가 여럿 생겼습니다. 에이티세미콘이 본업 매각자금을 포함해 3000억원이 넘는 유동성으로 2차전지 사업에 어떤 방식으로 진출을 할 지가 첫 번째 관심사이겠지만, 본업의 교체와 대규모 투자가 에이티세미콘의 경영권과 계열 구조에 어떤 변화를 불러 올 지도 흥미로운 구경거리입니다.
당장은 김형준 대표가 소유와 경영을 독식하고 있는 상황이지만, 2대 주주와 전환사채 및 신주인수권부사채의 인수자(또는 매입자)가 단순 투자자가 아니라면 최대주주와 경영권의 향방이 달라질 소지가 충분히 있습니다. 대규모 자금조달과 신사업 진출이 김형준씨가 회사를 매각하는 수순의 일부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죠. 물론 2대주주와 사채 인수자들이 김형준씨의 우호세력일 수도 있겠죠.
화장품 관련업을 하고 있는 지피클럽은 김정웅씨가 최대주주(479%)로 지난해부터 상장을 추진하고 있다는 보도가 몇 차례 나온 적이 있습니다. 아직 본격적인 절차를 밟고 있지는 않은 것으로 파악됩니다. 지난해 연결기준 매출액이 5000억원을 돌파했습니다. 11개의 국내외 자회사가 있는데 10개가 화장품 기획개발 또는 판매회사들입니다. 지난해 가전제품 및 부품 판매업을 하는 ㈜발리안트에 지분 60%를 출자하고 전환사채 400억원을 인수한 것이 사실상 처음으로 타업종에 투자한 사례로 보입니다.
눈에 띄는 건 자회사 외에는 타법인 지분을 보유한 게 없다는 점입니다. 확실하게 지배하는 자회사 말고는 경영참여 목적의 관계회사도 없고, 단순 투자 목적의 타법인 주식 보유도 없습니다. 에이티세미콘에 대해서는 경영참여와 지배구조 개선 목적의 투자라고 밝혔습니다. 김형준씨와 지분율이 크게 차이가 나지 않죠. 결국 2000억원에 달하는 전환사채와 신주인수권부사채에 포함된 잠재적 의결권이 향후 어느 쪽으로 향하느냐에 따라 에이티세미콘의 실질적인 주인이 결정될 모양입니다.
300억원의 자기전환사채를 받아가는 ㈜아임존은 전환사채의 유통을 위해 필요한 회사로 짐작됩니다. 한수지(100% 보유)씨가 단독주주인데, 자산이 전부 부채로 조성됐습니다. 에이티세미콘의 전환사채를 인수한 뒤 다른 여러 투자자에게 재매각을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리더스기술투자를 위시한 자회사들을 어떻게 처리할지도 이슈입니다. 바이오 자회사들은 투자금액이 미미해 별 의미가 없지만, 리더스기술투자는 거금 340억원을 들여 인수를 한 곳이기도 하고, 신기술금융회사로 자금조달의 창구 또는 기업 확장을 위한 M&A에 활용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대규모 적자와 전환사채 위주의 자금차입으로 모회사인 에이티세미콘에 주는 부담이 적지 않습니다. 지난해 11월 기사 '리더스기술투자 품은 에이티세미콘, 꽃 길 걸을까?'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몇 가지 선택지가 존재합니다. 이달 유입되는 유동성의 일부를 리더스기술투자에 넣어 회사를 안정화시킬 수도 있고, 그 전 또는 그 후에 매각을 할 수도 있을 겁니다. 또는 에이티세미콘이 보유한 지분을 김형준대표 또는 더에이치테크가 매입해 에이티세미콘과의 지분관계를 해소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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