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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이후 기업 경영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경제변수는 단연 금리입니다. 단지 빚이 있는 기업만 힘들어 지는 게 아닙니다. 저금리에서 고금리로의 급격한 변화는 경영여건을 완전히 다른 국면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에 그 영향에서 자유로운 기업은 거의 없습니다.


차입금이 많은 기업은 이자비용이 늘고 상환 압박에 시달립니다. 자산가치는 하락해 담보를 더 제공해야 하고 주가는 하락하기 때문에 유상증자와 기업공개도 어려워집니다. 금리는 거의 인플레이션을 동반하기 때문에 원재료 구입이나 인건비에 더 많은 비용을 지불해야 합니다. 최근의 금리상승의 이유가 수요초과(호황)의 영향이 아니기 때문에 매출과 이익은 감소합니다. 대부분 기업이 실적 악화를 겪게 됩니다.


뭐니뭐니해도 가장 큰 위험은 자금사정 악화입니다. 영업실적이 부진해 벌어들이는 돈은 줄고 투자를 당장 줄이기는 어렵기 때문에 현금흐름 부족이 발생하고 결국 현금 잔고가 줄게 됩니다. 국내 기업 중에는 1년내 만기 도래하는 차입금(단기성 차입금) 보다 많은 현금을 보유하고 있는 곳이 별로 없습니다. 주주들에게 증자를 더 해달라고 해서 갚지 않는다면, 만기연장을 하거나 돌려 막기(차환) 해야 합니다.


저금리 시절에는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돈을 빌려주겠다는 곳이 많습니다. 이자도 낮아 기업도 부담이 별로 없습니다. 금리가 빠르게 올랐다는 건 돈이 갑자기 귀해졌다는 겁니다. 전보다 훨씬 높은 금리를 부담하지 않고서는 자금을 구할 수가 없습니다. 금리를 높여서라도 돈을 구할 수 있으면 그나마 다행입니다. 금융기관과 금융시장 모두 리스크 회피 경향이 커지기 때문에 쉽게 빌려 주지 않습니다.



지난해 초 91일물 기업어음 금리는 1.56%에 불과했습니다. 9월말에는 2배가 넘는 3.30%에 도달합니다. 기업들의 위기의식은 그 당시 이미 최고조에 달했습니다. 8월 대한상공회의소가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80% 이상의 기업이 감내가능한 기준금리 수준을 3.0% 이하라고 응답했습니다.


빠르게 금리가 오르고 돈 구하기가 어려운 상황에서 기업들의 자금사정은 어땠을까요. 우량기업의 대표적인 집합소인 코스피 상장사들 중심으로 살펴 보겠습니다. 우선 영업활동에서 코스피 상장사들이 지난해 1~9월 동안 벌어들인 현금은 전년 동기 대비 60% 이상 감소했습니다.



3분의 1 이상의 기업은 영업활동에서 벌어들인 현금보다 사용한 현금이 더 많았습니다. 전년 동기 129개사에서 276개사로 두 배 이상 늘었습니다. 한국전력이 영업활동에서 20조원에 육박하는 현금적자를 냈고 한국가스공사 LG에너지솔루션, HDC현대산업개발, 삼성중공업, 대우조선해양, 포스코홀딩스 등이 1조원이 넘는 음(-)의 현금흐름을 기록합니다. 모두 직전년에 영업활동에서 적지 않은 현금을 창출했던 곳들입니다.


영업활동 현금흐름에서 자본적 지출(Capex)과 배당금 지급액을 제한 것을 잉여현금흐름이라고 하는데, 지난해 9월까지 코스피 상장사들은 36조원의 현금 부족 상태에 빠졌습니다. 벌어들인 현금으로 투자와 배당을 충당할 수 없었다는 겁니다. 자본적 지출과 배당금을 갑자기 줄이기 어려웠기 때문이겠죠. 불경기였던 2019년에도 발생하지 않았던 일입니다.


현금 부족이 발생한 기업은 253개사에서 420개사로 커졌습니다. 조사대상 734개사의 절반이 훨씬 넘습니다. 161개는 전년에 현금 잉여였다가 현금 부족으로 바뀐 곳들이었습니다. 호경기를 누리던 건설사들이 일제이 현금 부족에 들어갔고 삼성전자, 삼성중공업, 삼성물산, 삼성전기, 삼성엔지니어링, 삼성에스디에스, 삼성바이오로직스 등 국내 최고 기업인 삼성그룹 계열사들도 줄줄이 현금 부족기업 명단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영업활동에서 현금 부족 상황이 유상증자나 차입을 통해 추가로 조달을 하지 않는 한 보유 현금의 잔고가 줄게 되죠. 불확실성의 시대에 현금잔고가 줄어든다는 건 매우 위험할 수 있습니다. 자칫 차입금 상환 요구에 응하지 못할 경우 회사가 돌연사를 당할 수도 있습니다. 운영자금이 부족하거나 중요한 투자에 나서지 못해 경쟁에서 밀려날 수도 있고요. 보유현금이 줄어든 기업이라면 대체로 추가 자금 조달에 나서게 됩니다.


지난해 코스피 상장사들도 현금 잔고를 늘리기 위해, 운영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투자재원이 부족해서, 차입금을 늘리게 됩니다. 기존에 적용 받던 것보다 훨씬 높아졌을 금리를 부담하면서 말이죠. 734개 코스피 상장사의 단기차입금 합계는 8월말 200조원을 넘겼고 순차입금도 336조원에 달해 전년 동기보다 80조원이나 늘었습니다.



한국은행은 지난해 10월 기준금리를 3.0%로 인상하는 빅스텝을 밟습니다. 80% 이상의 기업이 마지노선이라고 했던 그 3.0%에 도달한 것이죠. 이후 3개월간 가히 폭력적이라고 할 만한 금리 급등이 벌어집니다. 게다가 강원도 레고랜드 사태가 터지면서 부동산PF 시장은 사실상 마비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기업들에게 가장 무서운 신용경색 현상이 나타난 것이죠. 국내 대표적인 재벌그룹인 롯데그룹 소속 롯데건설이 자칫하면 부도에 직면할 지도 모를 상황까지 갔을 정도니까요.


91일물 CP금리는 12월초 5.62%로 고점을 찍은 것으로 집계되었습니다만, 실제 기업들이 체감하는 금리는 훨씬 높았습니다.  롯데건설, 태영건설 등이 부동산PF 유동화증권을 차환하기 위해 제공한 금리가 무려 13~15%에 달했습니다. 투기등급 기업에게도 높다고 할 만한 금리 수준입니다.



10월부터 연말까지 기업들의 재무상황은 또 어떻게 변했을까요. 실적이 개선되었을 것으로 기대하기는 어렵고 자금사정은 최악을 향해 치달았을 것입니다. 많은 기업들이 금리 불문하고 자금 확보에 나섰을 것이 뻔합니다. 재무상태표의 부채란에는 2~4%대의 저리 차입금이 사라지고 두세배 높은 금리의 차입금으로 채워졌을 겁니다. 차환에 성공하지 못해 보유 현금이 바닥을 드러낸 기업들도 적지 않을 겁니다.


지난해 9월말 현재 코스피 상장사의 차입금의존도는 22.7%로 상승했고, 전체 차입금의 40%가 1년 내 만기인 단기성 차입금입니다. 굉장히 높은 비중인데 아마 지난해 4분기를 거치면서 더 높아졌을 것입니다. 전체 차입금의 40%가 1년내 만기도래한다면, 만기가 연중 분산되었다고 가정할 경우 매분기마다 전체 차입금의 10%를 상환하거나 새로운 금리로 차환해야 한다는 얘기가 됩니다.


올해 들어 금리가 하락 기조로 돌아서면서 시장의 위기감도 다소 진정되고 있습니다. 벌써부터 금리인하에 대한 기대가 고개를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올해 기업들의 평균 차입금리는 지난해보다 높을 것이 분명합니다. 코로나 같은 사태가 다시 발생하지 않는 한 말이죠. 기업들에게 고금리의 습격은 어쩌면 이제 시작일 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