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재무제표를 읽는 사람들의 기사는 작성 후 최소 1주일 경과된 시점에 무료 공개되고 있음에 유의 하시기 바랍니다.
회사채 시장에 봄이 온 걸까요? 지난해 10월 이후 뚝 끊겼던 공모 회사채 발행이 올해 들어 활기를 띠고 있습니다. 크게 높아진 금리에 매력을 느꼈는지, 기업들이 예정된 것보다 규모를 늘려 발행에 나서는 게 다반사입니다. 발행계획보다 투자수요가 많다는 것이죠.
오늘(9일)까지 올해 공모로 발행된 회사채는 17조6890억원에 이릅니다. 지난해 1~2월에 약 10조원이 발행되었는데 올해 1~2월에는 14조원이 넘고 3월에도 불과 9일만에 지난해 3월 발행액을 두 배 가까이 넘어섰습니다.

꽁꽁 얼어붙었던 회사채 시장이 어떻게 갑자기 풀린 걸까요? 가장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건 금리하락입니다. 지난해 10~11월 고점을 찍었던 시장금리는 12월부터 서서히 하락하더니 올해 1월에는 완연한 하락세를 보였습니다. AA-등급 회사채 기준으로 거의 6%까지 갔다가 최근에는 4.5% 수준에서 등락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금리는 지금도 매우 높은 편입니다. 지난해 이맘 때 AA-등급 회사채 금리는 2%대 중후반이었어요. 지금의 금리는 지난해 8~9월 수준인데 그 당시에도 회사채 발행은 매우 부진했습니다. 월 1조원을 간신히 넘기는 정도였어요.
회사채시장의 활기는 다른 곳에서 이유를 찾아야 합니다. 금리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발행이 가능해졌다'는 것입니다. 지난해 10월 이후 민간기업이 회사채를 발행해 자금을 조달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습니다. 강원도 레고랜드 사태 이후 부동산PF 시장의 경색으로 건설사들이 집단적인 부도 위기에 몰렸을 때 회사채 시장 역시 완전히 멈추었기 때문이죠. 건설사들이 20%에 육박하는 금리에도 자금을 조달하려고 이리 뛰고 저리 뛰었던 것처럼, 다른 기업들 역시 자금이 필요한 곳들은 높은 금리를 주더라도 회사채 발행에 나섰을 겁니다.
하지만 그러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공모 회사채는 보통 증권사가 총액인수를 하고 기관투자가들을 대상으로 매각하는데, 기관투자가들이 자금집행을 하지 않으니 증권사들도 선뜻 인수에 나서기 어려웠죠.
위 그림만 보면 지난해 9월 이전이나 10월 이후나 발행액이 비슷해 보이지만 현실은 매우 달랐습니다. 8~9월에는 총 121개 종목이 발행됐습니다. 10~12월에는 38개 종목만이 발행됐을 뿐입니다. 발행기업 수로는 15개사에 불과했습니다. 레고랜드 여파가 본격적으로 회사채 시장에 미친 11월 이후에는 정말로 심각했습니다. 두 달 동안 한국전력 자회사들을 제외하고 순수 민간기업으로 공모 회사채를 발행한 곳은 딱 두 곳, SK㈜와 SK텔레콤 뿐이었습니다.

일각에서는 한국전력과 그 자회사들 물량이 쏟아지는 바람에 회사채 파동이 났다고 하지만, 잘 모르고 하는 소리로 들립니다. 10월 이후 세 달 동안 한국전력의 발전자회사들이 발행한 회사채는 1조1200억원에 불과합니다. 오히려 한국전력이 회사채 시장에 산소호흡기 역할을 했다고 하는 게 더 맞을 것 같습니다.
부동산PF 문제로 단기금융시장이 경색되는 것도 큰 문제이지만, 회사채 시장의 경색 역시 경제적 재난 상황이라고 할 정도로 큰 문제입니다. 기업들이 ▲대규모 자금을 ▲신용으로 ▲장기간 빌릴 수 있는 곳은 회사채 시장이 거의 유일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거든요. 회사채 시장이 막히면 기업들은 은행 등 금융기관에 달려갈 수밖에 없는데, 2금융권은 물론이고 국내 은행들도 3년 이상의 장기로는 대출을 잘 해주지 않고, 그나마 담보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니 대규모 자금이 필요했거나, 기존의 차입금 만기가 돌아와 상환자금을 마련해야 하는 기업들은 지난해 4분기를 어떻게 넘겼을까요. 다행히 여유자금이 있는 곳들은 버텼을 테지만, 그렇지 않은 곳들은 전부 금융기관을 찾아가 1년이내의 단기차입을 하거나 엄청 높은 금리로 기업어음을 발행해 증권사 등에서 융통했을 것입니다.
정부의 부동산규제 완화와 건설사에 대한 자금지원, 부동산PF 대책 수립 등으로 올 들어 부동산PF시장이 급한 불을 끄자, 회사채 시장도 살짝 풀리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허리띠를 졸라매며 지난 겨울을 넘겼던 기업들, 장기자금을 금융기관 등에서 단기로 융통했던 기업들이 기회를 놓칠 세라 회사채 발행을 서두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회사채 시장은 아직 봄이 아닙니다. 봄은 한참 멀었습니다. 지금은 아랫목만 살짝 녹았을 뿐입니다. 신용등급이 사실상 최고 수준이라고 할 수 있는 AA등급 이상의 기업에만 발행이 허용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회사채 시장은 좁은 문입니다.

올해 공모시장에서 회사채 발행에 성공한 기업은 고작 70개사뿐입니다. 기업당 2527억원 규모로 발행했습니다. 지난해에는 1~3월에 321개 기업이 평균 437억원씩 발행했습니다. 발행 기업은 크게 줄었고, 기업당 발행규모는 5배 이상 커졌습니다.
극소수의 기업이 평소보다 훨씬 대규모로 자금을 조달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반면 대부분의 기업은 금리가 너무 높거나 투자수요가 전혀 없어서 회사채 발행을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올해 회사채 시장은 완전히 AA이상의 최고 신용등급을 갖추어야만 노크가 가능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BBB급 기업 6곳이 발행에 성공하기는 했지만 특수한 사례입니다. 2690억원 중 300억원은 만기가 2년이고 나머지는 모두 1년 만기의 회사채인데다 금리 역시 8~9%로 등급에 비해서도 높게 주어야 했습니다.
A급 회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14개사가 평균 1450억원씩 2조300억원을 발행했는데. 3년 초과물은 전무하고 3년물도 6200억원에 불과합니다. 나머지는 만기가 3년 미만입니다. 게다가 금리도 자기 신용등급에 비해 높았습니다.
올해 공모 발행된 일반 회사채가 총 17조6890억원이라고 했는데요. 15조3900억원이 AA등급이거나 AAA등급입니다. 명실공히 국내 최고 신용을 갖춘 곳들이죠. 총 47개사가 평균 3000억원 이상을 회사채 발행으로 조달했습니다.
이들의 조달 목적은 대부분 만기도래하는 차입금 상환용입니다. 예년 같으면 연중 나누어 발행할 것을 올해에는 연초에 집중적으로 발행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지난해 4분기의 트라우마 때문일 겁니다. 회사채 시장이 기회를 줄 때 미리미리 발행해 두지 않으면 언제 다시 문이 닫힐 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을 겁니다.
국내 회사채 시장이 우량 기업만의 놀이터인 게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닙니다만, 이렇게까지 좁은 문이었던 적이 있었나 싶습니다. 지금과 같은 상황이 지속된다면 정말 큰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금융기관에서 찔끔찔끔 빌려서는 대규모 투자를 하기도 어렵습니다. 예정했던 투자는 차일피일 미루어질 것입니다. 기업들이 장기 자금을 조달할 길이 사라지면, 차입금의 만기는 점점 짧아질 것이고, 매일 빚 갚느라 볼 일 못 보게 됩니다. 그러나 유동성경색이 재연되기라도 하면, 졸지에 부도 위기에 몰리는 기업은 더 많아지겠죠.
* 재무제표를 읽는 사람들이 제작하는 모든 콘텐츠의 저작권은 DRCR(주)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