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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적이 금리에 민감한 대표적인 기업은 역시 금융회사입니다. 자산과 부채의 대부분이 금융자산과 금융부채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죠. 그 중에서도 장기 채권의 가장 큰 수요자인 보험사는 금리가 바뀌면 실적이 크게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국내 최대 보험사인 삼성생명은 지난해 말 현재 281조원(개별 재무제표 기준, 이하 같음)에 달하는 자산을 보유하고 있고, 그 중 203조원이 금융자산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특별계정에 포함된 금융자산까지 하면 251조원으로 늘어납니다. 금융자산은 대부분 지분증권(주식)과 채무증권(채권)이죠.


금융자산인 지분증권은 종속회사나 관계회사 지분을 제외한 것입니다. 그 규모가 지난해말 현재58원에 이르고, 그 중 삼성전자 지분의 가치는 28조원에 달합니다. 삼성생명은 삼성전자 지분 8.51%를 보유한 최대주주이고 경영참가 목적으로 보유하고 있지만, 삼성전자를 관계회사로 분류하지 않습니다. 삼성물산이 그렇게 하는 것처럼.



보험사의 자산운용이 대체로 채권 위주로 되니 삼성생명 역시 아무래도 채무증권 보유액이 훨씬 많습니다. 무려 130조원이나 됩니다. 그 중 특별계정 보유분을 제외하면 91조원인데, 국공채가 58조원으로 가장 많고, 금융채와 특수채가 28조원, 회사채가 약 6조원가량 됩니다. 대체로 안전자산 위주로 운용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안전자산이라는 말이 부도로부터 안전하다는 것이지 금리변동위험에서 자유롭다는 뜻은 아니죠. 삼성생명도 주가하락과 금리상승으로 인한 금융자산의 평가손실을 피해갈 수 없었습니다. 삼성생명의 영업수익(제조업체의 매출액에 해당)은 지난해 큰 폭 증가하면서 30조원 벽을 넘어서 34조원을 기록했습니다. 하지만 전년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2146억원으로 줄었고, 당기순이익 역시 전년보다 대폭 줄었죠. 당기순이익이 영업이익보다 커진 것은 종속 및 관계기업의 투자배당금 수익(5010억원), 유/무형자산 처분이익(2341억원) 등이 보태 졌기 때문입니다.



자칫하면 삼성생명이 영업적자를 기록하는 참사가 일어날 뻔했습니다. 삼성생명이 지난해 10월서울 강남의 대치타워와 중구 소공동 에스원빌딩을 삼성에프엔위탁관리 부동산투자회사에 각각 4811억원과 1965억원에 매각했는데, 이 같은 투자부동산 및 매각예정자산 처분으로 2789억원의 이익이 발생했습니다. 두 건의 매각이 없었으면 영업적자를 면치 못했을 겁니다.


삼성생명 수지가 악화된 건 지급보험금이 전년보다 6조7500억원가량 늘어난 영향이 가장 큽니다. 대신 보험계약부채전입액이 5조8300억원 감소했지만 여전히 9200억원 정도의 영업이익 감소를 유발했죠. 여기에 한술 보탠 것이 당기손익으로 인식된 금융상품 평가손실 1조6500억원입니다. 물론 평가이익도 발생했지만 1조3900억원으로 평가손실보다 2600억원이 적었습니다.


그런데 진짜 참사는 다른 곳에서 터졌습니다. 자기자본이 34조원에서 17조원으로 반토막 났습니다. 감자를 한 것도 아니고, 자기주식을 매입한 것도 아니고, 배당금은 5387억원을 지급했을 뿐인데 말이죠.



자기자본을 싹둑 잘라먹은 범인은 무려 16조원에 달하는 기타포괄손실입니다. 이 어마어마한 평가손실은 손익계산서를 거치지 않기 때문에 영업이익이나 당기순이익에는 영향을 주지 않지만, 미실현손실로 보아 자기자본에서 직접 차감하거든요.


기타포괄손실은 매도가능금융자산의 평가손실입니다. 삼성생명은 주식이나 채권 등의 유가증권을 당기손익금융자산, 매도가능금융자산, 만기보유금융자산 등으로 분류하는데요. 당기손익금융자산의 평가이익이나 손실은 당기순이익에 반영되지만, 매도가능금융자산의 평가이익이나 손실은 기타포괄손익이라는 이름으로 자본에서 직접 더하거나 뺍니다.  만기보유금융자산은 금리변화에 따른 가격변동을 인식하지 않죠.


사실, 삼성생명의 기타포괄손실은 21조원까지 늘어날 수 있었습니다. 지난해 주가 하락과 금리 급등으로 보유 주식과 채권에서 평가손실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자, 삼성생명을 비롯한 보험사들이 연중에 매도가능금융자산으로 분류하던 채무증권을 만기보유금융자산으로 대거 재분류합니다. 금리 상승으로 더 이상 평가손실이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한 궁여지책이었죠.



만기보유금융자산으로 바꾼 유가증권이 모두 96조4536억원입니다. 사실상 매도가능금융자산 전부를 재분류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요. 대부분 채무증권을 만기보유금융자산으로 재분류한 뒤인 지난해 10월 이후 금융시장에서는 강원도 레고랜드 사태가 터지며 금리가 큰 폭으로 상승했습니다.


만기보유금융자산으로 재분류했다고 해서 채권가격이 하락하지 않는 것은 아니죠. 다만 채권가격 하락을 무시하고 손익계산서에도, 재무상태표에도 그 손실을 기록하지 않을 뿐입니다. 그렇게 무시된 평가손실이 4조9066억원에 달합니다. 계정 재분류를 하지 않았다면 삼성생명의 지난해 말 자기자본은 17조원이 아닌 12조원이 되었겠죠.


오죽하면 그랬을까 싶지만, 평가손실을 인식하지 않기 위해 만기보유금융자산으로 재분류한 것은 꼼수입니다. 만기보유금융자산은 올해부터 사라지거든요. 회계상 금융자산 분류 체계는 2018년부터 바뀌었지만, 삼성생명 등 보험사들은 새로운 기준의 적용을 지난해까지 면제되었죠.


하지만 올해부터는 새로운 분류체계를 따라야 하고, 새 분류 체계에는 만기보유금융자산이 없습니다. 모든 유가증권은 공정가치의 변화를 평가이익이나 평가손실로 인식해야 하고, 다만 당기손익으로 처리할 것인지, 기타포괄손익으로 처리할 것인지만 회사가 결정할 수 있습니다. 삼성생명은 새 회계기준 적용을 불과 몇 달 앞두고 장부상 평가손실 확대를 막기 위해 회계변경을 했던 것이죠.


자기자본이 반토막 나는 바람에 삼성생명의 지급여력비율(RBC비율)은 2021년말 304%에서 지난해 말 244%로 크게 떨어졌습니다. 하지만 3월이면 다시 상승해 있는 RBC비율을 보게 될 겁니다. 올해부터 보험사의 부채도 공정가치로 평가를 받기 때문에 보험부채의 평가액도 상당 폭 줄어들 것으로 예상되거든요. 지급해야 할 보험금의 평가액이 감소하면 RBC비율은 오르게 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