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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급격한 금리상승과 경기위축을 겪으면서 국내기업들의 자금사정이 대체로 나빠졌고 재무상태도 악화되었습니다. 금융위기 시기를 제외하고 기업들이 이 정도로 유동성 압박을 받았던 적이 있었던가 싶었죠. 업종에 따라 어떤 업종은 매출과 이익이 늘기도 했습니다만, 손익계산서의 숫자일 뿐인 경우가 적지 않았습니다. 매출과 이익이 큰 폭으로 늘어났음에도 불구하고 회사는 통장 잔고가 바닥을 드러내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일이 다반사였습니다.
기업의 경영성과는 주로 매출과 이익 중심으로 보고되기 때문에 내밀한 자금사정은 외부에서 파악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얼마의 현금이 들고 나는지를 알려주는 현금흐름표라는 재무제표가 있지만 관심있게 보는 투자자는 별로 없습니다. 하지만 지난해는 손익계산서에 나타나는 실적과 자금사정의 온도차이가 매우 컸던 해였습니다. 12월 결산인 코스피 상장사(금융회사 제외)의 개별 재무제표를 단순합산해 보면 지난해 상장사의 영업이익은 약 33% 줄었고, 영업활동으로 벌어들인 현금은 40% 감소했습니다. 무엇보다 벌어들인 현금으로 Capex와 배당을 충당하지 못하는 현금부족에 빠졌습니다. 부족한 폭이 상당히 큽니다.
내노라하는 재벌그룹 중에 특히 우려를 자아낸 곳이 두 곳 있습니다. SK그룹과 롯데그룹입니다. 두 그룹 모두 대대적인 사업 재편이 진행 중이고 신사업에 대규모 투자를 하고 있습니다. 돈을 잘 벌어서 곳간을 축내지 않고도 그 많은 투자를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만 아쉽게도 두 그룹 모두 그렇지가 못했습니다. 미래의 수익창출을 위해 쏟아붓고 있는 엄청난 자금을 대부분 외부에서 조달하고 있죠. 갚아야 할 빚이 급격히 늘었고 상환능력은 떨어졌습니다. 두 그룹에 대한 높았던 신용에는 의심이 스며들고 있습니다.
SK그룹은 몇 년 전부터 신용시장의 우려를 자아냈습니다. 친환경과 신에너지 중심으로 그룹 전체의 사업을 재편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미래 먹거리 투자에 속도조절이 필요하다는 지적을 받아왔습니다. 주요 계열사 신용등급은 하향 추세였습니다. 특히 에너지와 화학 부문에 속한 SK이노베이션, SK에너지, SK E&S, SK인천석유화학의 신용등급은 한 단계씩 떨어졌습니다.
SK그룹은 지난해 새로운 역사를 썼습니다. 계열 통합 차입금이 100조원을 넘어섰습니다. 최상위 지주회사인 SK㈜의 연결 차입금과 SK하이닉스의 연결 차입금은 합계는 약 105조원을 기록했습니다. 전년보다 20조원 이상 늘었고 4년만에 2.5배가 되었습니다. 매우 빠른 증가세입니다. SK그룹의 주요 계열사들은 대부분 SK㈜의 종속회사이거나 손자회사입니다. SK㈜의 연결 재무제표에 실적과 재무가 녹아 있습니다. 하지만 자산규모 104조원(연결 재무제표 기준)으로 그룹의 최대 회사인 SK하이닉스는 종속회사가 아닌 관계회사입니다. 그룹의 총 차입규모를 알기 위해서는 SK하이닉스의 차입금을 추가로 더해주어야 합니다.
채무상환능력을 나타내는 각종 지표들은 일제히 나빠졌습니다. 대표적인 레버리지 지표인 부채비율은 코로나 이전 100% 미만에서 지난해말 120.9%까지 높아졌고 전체 자산 중 차입금의 비중을 의미하는 차입금의존도는 35.1%에 달합니다. SK㈜의 신용등급이 AA인데, 등급에 걸맞지 않게 매우 높은 수준입니다.
게다가 전체 차입금 중 올해 갚아야 할 단기성차입금 비중이 36.1%에 달해 역시 상당히 높습니다. 단기적인 상환부담이 매우 큽니다. 차입금의 만기구조가 단기화되면 유동성리스크에 노출될 가능성이 커지게 됩니다. 모르길 몰라도 이렇게 된데는 지난해 금융시장의 상황이 영향을 미쳤을 것 같습니다. 금리가 큰 폭으로 오른데다 4분기에는 레고랜드 사태로 기업어음 시장과 회사채 시장이 사실상 마비돼 버렸죠. 당시 많은 기업들이 장기차입금이나 회사채를 은행의 단기차입금으로 차환했습니다.
벌어들이는 돈으로 원리금을 얼마나 갚을 수 있는지를 나타내는 커버리지 지표도 큰 폭으로 하락했습니다. 순차입금/EBITDA는 1.6배에서 2.0배로 높아졌습니다. 보유 현금과 연간 벌어들이는 현금성 영업이익을 전부 빚 갚는데 쓰면, 전액 상환하는데 2년이 걸린다는 소립니다. 악화됐지만 절대적으로 나쁜 수치는 아닙니다. EBITDA/금융비용은 21배에서 14배로 낮아졌습니다. 연간 금융비용의 14배에 달하는 EBITDA를 창출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 지표들을 액면 그래도 받아들일 수는 없습니다. SK그룹이 창출하는 EBITDA를 전부 차입금 원리금 갚는데 쓸 수는 없으니까요. 오히려 당분간 차입금 상환은 언감생심일 것으로 보입니다. SK그룹의 씀씀이가 보통 큰 게 아니거든요.
왜 차입금이 급증하고 있을까요? SK그룹이 사업확장과 사업재편에 엄청난 투자를 진행 중이기 때문입니다. 좋게 보면 지금 무리를 해서라도 적극적으로 투자를 하면 미래에 더 많은 매출과 이익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때까지는 계속 빚이 늘어날 수밖에 없고, 투자금을 회수하는 시기가 늦어지거나 수익창출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빚 갚는 일이 매우 고단할 수 있습니다.
SK그룹이 지난해 매출이 27%가량 크게 증가했고 연간 37조원의 EBITDA를 창출했지만 실제 현금흐름은 EBITDA와 상당한 온도차이를 보입니다. 영업활동에서 벌어들인 현금은 약 26조원에서 22조원으로 줄었습니다. EBITDA 중 상당부분이 현금으로 유입되지 않았습니다. 특히 지난 2년간 그런 현상이 두드러집니다. 매출채권과 재고자산이 크게 늘어나면서 운전자본으로 잠겨버렸습니다.
SK그룹의 잉여현금흐름은 (-)13조원 이상입니다. 영업활동에서 번 돈보다 13조원 이상 많은 돈을 설비투자와 배당금 지급에 썼다는 얘깁니다. 단지 지난해만 그런게 아니고요. 최근 몇 년동안 SK그룹이 보여주고 있는 현상입니다. 통상 잉여현금흐름은 영업활동 현금흐름을 자본적 지출과 배당금 지급액의 합계와 비교해서 추정합니다. 하지만 최근에는 설비투자와 지분투자를 구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기업들이 직접 공장을 세우지 않고, 이미 공장이 있는 다른 기업의 지분을 인수하거나, 합작 투자 형태로 생산법인을 신설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인수하거나 신설한 기업이 종속회사가 아니면 그 투자는 설비투자에서 빠지고 관계기업 투자 등 지분투자로 잡히게 됩니다.
SK그룹은 지난 5년간 약 115조원의 영업활동 현금흐름을 창출했는데요. 설비투자에 쓴 현금은 125조뤄 10조원가량 더 많습니다. 같은 기간에 배당금 12조5440억원을 지급했고, 관계기업에 출자하는데 14조원가량 썼습니다.
버는 돈보다 쓰는 돈이 훨씬 많으니 일부 자산을 현금화하기도 하고 통장에 있던 돈을 빼서 쓰게 되는데, 최근 2년간 모자라는 돈이 너무 커졌습니다. SK그룹은 부족해진 현금을 채우기 위해 대대적인 차입에 나설 수밖에 없었죠. 최근 5년간 SK그룹은 무려 49조원을 차입했습니다. 이 돈으로 설비투자와 지분투자를 보태고, 보유현금을 늘려 놓았습니다. 2021년초 13조원이던 보유현금은 지난해말 26조원이 되었습니다. 앞으로의 투자에도 대비하고 만약에 대비해 유동성도 충분히 가져가려고 하는 모양입니다.
오늘은 SK그룹의 전반적인 자금사정과 현금흐름을 간단히 훑어보았는데요. SK그룹은 여러 개의 소그룹으로 나누어져 있고, 각 소그룹이 별도로 사업활동과 재무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각 소그룹의 사정은 또 제각각입니다. 가령 SK텔레콤이 이끄는 통신계열은 자금사정이 괜찮지만 SK그룹이 미래의 성장동력으로 밀고 있는 에너지/화학 부문은 자금이 매우 쪼들리는 상황이고, 그룹의 최대 자산인 SK하이닉스가 지난해 하반기 이후 갑자기 나빠졌습니다. 다음 편에서는 SK그룹의 소그룹별로 조금 더 자세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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