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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표그룹이 지주회사 삼표를 자회사 삼표산업에 역합병시키는 이례적인 지배구조 개편을 단행했죠. 지주회사 체제를 갖춘 지 딱 10년만입니다. 그룹의 주력회사인 삼표산업은 2013년 삼표에서 골재, 레미콘 및 콘크리트제조부문을 물적분할해 설립되었습니다. 그해 말 삼표는 공정거래위원회로부터 지주회사 통보를 받았죠. 그러니까 두 회사는 10년만에 다시 한 회사가 된 셈입니다.
이상한 일이죠? 적은 자본으로 다수의 계열사를 지배할 수 있는 꿀 먹는 지배구조인 지주회사 체제를 애써 만들어 놓고 스스로 그걸 뒤집는 결정을 한다니 말입니다. 지주회사 역합병의 배경으로 3세 승계를 떠올리는 건 자연스럽습니다. 그런데 일부 언론에서는 정도원 회장에서 정대현 사장으로의 승계와는 관련이 없는 경영효율화 차원이라는 해석을 내놓고 있습니다. 역합병 이후 정대현 사장의 실질 지분율에 중대한 변화가 없다는 게 그런 해석의 근거입니다.
물론 경영효율화는 삼표그룹이 내놓은 설명입니다. 양사의 시너지 효과를 창출해 경쟁력을 키우고 새로운 성장기회를 확보하기 위한 합병이라는 게 삼표그룹의 입장입니다. 그런데 지주회사와 사업자회사가 합쳐져서 어떤 시너지가 난다는 걸까요? 새로운 성장기회는 현행 지주회사 체제에서는 확보하기 어려운 걸까요? 그럴 듯해 보이지만 뜬구름 잡는 이야기입니다.
반면 3세로의 승계를 위한 전초작업이라고 보면 훨씬 잘 이해가 됩니다. 두 회사의 합병은 향후 정대현 사장의 지배력에 크나 큰 변화를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죠. 지주회사 체제를 계속 유지하거나 삼표가 삼표산업을 합병해서는 쉽게 일어날 수 없는 변화를 말이죠.
삼표산업이 지주회사 삼표를 역합병했을 때, 다른 합병에서 볼 수 없는 현상은 초대규모의 자기주식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삼표는 삼표산업 지분을 무려 98.25% 보유하고 있습니다. 양사가 합병할 경우 합병법인의 자사주는 거의 절반(48.9%)에 가깝습니다. 정대현 사장이 이 자사주를 자신의 통제 아래 둘 수 있다면 아버지 정도원 회장의 지분 없이도 그룹의 경영권을 확보할 수 있습니다.
삼표그룹이 합병 후 자사주를 어떻게 처분할 지는 지켜보면 될 일입니다. 또 삼표그룹의 지주회사 역합병이 승계의 유용한 수단으로 입증될 경우 다른 지주회사 체제의 그룹들이 삼표의 사례를 참고할 지도 관전 포인트가 될 것입니다.
과거를 알면 미래가 보입니다. 미래는 과거로부터 흘러온 시간의 맥락이 연장된 결과물일테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삼표그룹이 지금의 지배구조를 갖추기까지 과정을 되짚어 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삼표그룹의 전신인 강원산업그룹은 1997년 외환위기때 워크아웃에 들어갑니다. 2000년에 강원산업과 삼표제작소를 현대그룹에 매각하고, 정인욱 창업자의 차남인 정도원 회장이 삼표산업을 중심으로 거의 재창업을 하다시피했습니다. 2002년 워크아웃에서 벗어나고 2004년 계열사 상호를 '삼표'로 일원화합니다. 지주회사를 포함해 주요 계열사들이 대부분 비상장사이고, 유일한 상장사인 삼표시멘트는 2016년 옛 동양그룹에서 인수(전신이 동양시멘트)했습니다.
삼표는 그룹내 계열사간 합병이 유난히 많습니다. 그리고 그 합병들이 지금의 지배구조와 관련이 깊습니다. 그 시작은 아마도 2013년에 있었던 정도원 회장의 개인회사였던 ㈜대원과 대원의 자회사 삼표로지스틱스의 합병일 것입니다.
1999년 12월 설립된 삼표로지스틱스(당시 상호는 한국사이버물류)는 2000년 6월말 기준 납입자본 6억원에 자산총액은 28억원 규모의 소기업이었습니다. 그룹의 일감을 바탕으로 성장해 2012년말에는 자기자본 239억원, 자산총액 821억원짜리 회사가 됩니다. 매출액은 같은 기간에 119억원에서 1960억원까지 늘게 되죠.
정도원 회장 등이 49.09%를 출자했고 삼표산업(36.36%), 강원레일테크(14.55%) 등 계열사가 설립을 도왔습니다. 당시 삼표산업은 현 삼표의 전신이고 강원레일테크는 삼표산업의 100% 자회사였습니다. 그러니까 삼표로지스틱스도 삼표산업의 자회사였던 셈이죠. 워크아웃을 졸업한 삼표산업의 지분 99%는 정도원 회장의 소유였고요. 삼표산업은 2004년 ㈜삼표로 상호를 변경합니다.
2007년 삼표로지스틱스는 정대현 사장의 회사가 됩니다. 70%의 지분을 보유 중이던 삼표산업이 지분을 ㈜대원과 대원의 특수관계자에게 매각한 겁니다. 장부가 43억원인 주식을 18억원에 넘겨 25억원의 처분손실을 입습니다.
㈜대원은 2004년 설립된 건설장비업체로 정도원 회장 개인회사였습니다. 정도원 회장은 2007년 대원의 지분을 정대현 사장과 두 딸에게 양도를 하는데 두 딸의 지분은 후에 정대현 회장에게 전부 넘어갑니다. 지분 매각거래 이후 삼표로지스틱스의 최대주주는 대원(50%)과 정대현 사장(30%) 그리고 두 딸이 각각 10%씩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삼표그룹이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하는 2013년말까지 지분율에 큰 변화는 없었죠.
정대현 사장의 회사가 된 대원은 삼표로지스틱스를 활용해 규모를 키웁니다. 삼표의 자회사인 홍명산업과 삼표기초소재의 지분을 인수하고 유상증자를 통해 지분율을 높여 자회사로 편입합니다. 그 결과 2012년말 연결기준 자산총액 1659억원, 매출액 2687억원으로 커져 정대현 회장의 승계를 위한 든든한 토대가 됩니다.
삼표로지스틱스의 성장과 계열사 지분 거래로 삼표그룹은 아버지 회사와 아들의 회사로 나뉘게 됩니다. 물론 3세인 정대현 사장으로 삼표그룹의 경영권을 승계하기 위해 아들의 회사를 키워 왔던 것이죠. 2013년 삼표그룹이 지주회사로 전환하면서 드디어 3세 승계 작업이 본격화됩니다.
삼표그룹의 지주회사 전환은 세 단계의 합병과 분할의 과정을 거칩니다. 우선 아들의 회사 대원이 삼표로지스틱스를 합병하죠. 그리고는 다시 대원과 신대원으로 인적분할을 합니다. 동시에 아버지 회사 삼표는 골제, 레미콘 및 콘크리트제품 제조부문을 물적분할해 삼표산업을 설립합니다. 그렇게 지주회사가 된 삼표는 신대원과 분리된 아들의 회사 ㈜대원을 흡수합병하게 되죠. 대원의 주주 정대현 사장이 삼표의 주요 주주로 등장하는 순간이죠.
이 과정에서 삼표로지스틱스가 보유하던 계열사 지분은 신대원의 자산으로 분류됩니다. 플라이애쉬 제조업체인 삼표기초소재, 레미콘업체 유니콘과 그 외 홍명산업 당진철도 양주아스콘 타워레미콘 등입니다.
인적분할은 정대현 사장이 개인기업을 더욱 키우는 계기가 됩니다. 2017년 삼표기초소재를 합병한 뒤 상호를 삼표기초소재로 변경하고, 2018년에는 남동레미콘을 흡수합병합니다. 또 2019년에는 ㈜알엠씨와 당진철도㈜를 흡수합병하는데 이렇게 탄생한 기업이 바로 에스피네이처입니다.
에스피네이처로 상호변경을 한 후에도 합병은 계속됩니다. 알엠씨와 당진철도 외에 2019년 흡수합병한 회사로 ㈜경한, ㈜네비엔, 네비엔알이씨㈜, 당진에이치이㈜ 등이 있습니다. 이중 주목할 기업으로 네비엔이 있습니다. 정대현 사장이 대부분 지분을 갖고 있던 두 회사 삼표건설과 네비엔이 합병해 탄생한 이 회사는 2010년 아버지 회사 삼표이앤씨에서 분할된 철근 및 콘크리트 공사업을 합병하죠.
이렇게 아들의 회사 에스피네이처는 아버지 회사였던 계열사들을 차례차례 합병하며 그룹 지배구조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그룹의 일감을 바탕으로 성장한 삼표로지스틱스를 지렛대로 삼아 확실한 승계의 주춧돌이 되어 온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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