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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이 넘는 오랜 역사를 지닌 자동차 내연기관 부품업체 청보산업이 씨비아이(이하 CBI)라는 지금의 상호를 갖게 된 건 지난 2021년 6월입니다. 창업자 가족이 2020년 12월 경영권을 그로우스앤밸류13호 투자조합에 양도하면서 전혀 다른 회사가 됩니다. 사실상 껍데기만 남기고 내용을 전부 갈아치웠다고 해도 될 것 같습니다.
당연히 제일 먼저 주주총회를 거쳐 경영진 교체가 이루어졌겠죠? 오너일가는 물론이고 자동차부품업에서 잔뼈가 굵은 사내•외 임원이 한명도 빠짐없이 전원 물갈이됩니다. 새로 선임된 이사 중에 기존 사업에 정통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실질적인 최대주주인 그로우스앤밸류디벨로프먼트(이하 그로우스앤밸류) 임원진 3명(오경원 부회장, 이호준 대표이사, 성봉두 대표이사)과 신흥정보통신이라는 회사의 재무이사인 장육씨가 사내이사로 선임되었고, 사외이사 3인 역시 자동차부품업과는 거리가 먼 분들이었습니다.
새로운 경영진은 도심항공교통 플랫폼, 수소연료전지 개발, 유람선 운항, 블록체인 플랫폼 등 무려 23개의 새로운 사업목적을 정관에 추가하고 상호를 CBI로 바꿉니다. 기존의 자동차 내연기관 부품사업은 물적분할해 청보산업을 설립합니다.
주인이 바뀌기 전 청보산업에는 평균 근속연수 9년이 넘는 97명의 정규직 직원이 근무 중이었습니다. 그러나 불과 1년 후 직원 수는 47명으로 줄었고 평균 근속연수는 4년이 조금 넘었습니다. 절반 이상의 직원이 회사를 떠난 셈입니다.
아마 가장 큰 변화는 전에 없이 활발한 자금조달이었을 겁니다. 2021년초 새 경영진이 등장하자마자 인천광역시시 남동구 소재 공장을 112억원에 매각하고 44억원을 들여 인천광역시 서구에 새로운 공장을 매입합니다. 기존 공장 옆에 위치한 임대 중인 부동산도 52억원에 팔아치웁니다.
또 4회차 50억원, 5회차 50억원, 6회차 100억원 등 총 200억원의 전환사채를 동시에 발행합니다. 그 중 100억원은 M&A용이었습니다. 그런데 새로 구성된 이사회가 전환사채 발행을 결정한 날은 2021년 2월말인데, 사채에 대한 청약이 이루어진 날은 경영권 지분에 대한 양수도계약이 체결된 2020년 12월 2일이었습니다. 새로운 최대주주는 회사 인수 전부터 대규모 자금을 조달해 M&A에 나설 계획을 다 짜놓았던 모양입니다.
청보산업은 1978년 설립되었는데 경영권을 넘기기 전까지 사채 발행이 고작 세 번뿐이었고 전환사채는 2020년에 매입대금 결제용으로 발행한 40억원이 전부였습니다. 유상증자는 2002년에 약 10억원 이후 18년 동안 한 적이 없을 정도로 외부자금 조달에 인색했습니다. 자회사는 물론 관계회사를 거느린 적이 한번도 없었고, 심지어 2020년말 현재 한국자동차기계공업협동조합과 한국주물공업조합에 각각 100만원과 50만원을 출연한 것 외에는 다른 회사 지분이 전혀 없었습니다. 말 그대로 60년 외길 인생이었습니다.
전환사채 발행 후 겨우 한달 지났을 무렵 7회차 120억원, 8회차 50억원 등 두 차례에 걸쳐 신주인수권부사채도 발행합니다. 7회차 120억원은 대출금 상환에 쓸 자금이었는데, 사실상 담보대출에 가까웠습니다. 만기이자율이 5%로 주식관련 사채치고는 꽤 높았고 채권원금의 130%에 달하는 공장부지와 건물을 담보로 제공했습니다. 바로저축은행 등이 사채 인수처였습니다. 8회차 50억원은 운영자금 용도였는데 담보를 제공하지는 않았지만 만기이자율이 8%에 달했고 상상인플러스저축은행이 발행 상대였습니다.
그로우스앤밸류가 인수 전 청보산업의 총차입금은 3회차 전환사채 포함 200억원 정도였고, 그해 만기도래하는 차입금은 30억원 수준이었습니다. 전환사채를 조기상환한다고 해도 70억원 정도였습니다. 2022년 만기 차입금도 17억원에 불과했습니다. 상환부담이 크지 않았습니다.
새로운 경영진은 금리 1%, 2%대인 우리은행과 기업은행의 단기차입금과 장기차입금을 전액 상환했습니다. 자발적인 상환인지, 은행의 상환요구가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만기가 길게 분산돼 있던 장기차입금까지 전액 상환된 걸 보면 자발적이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사채를 포함한 CBI의 차입금은 400억원으로 오히려 크게 늘었습니다. 농협에서 기존보다 높은 3%대 금리로 30억원을 2년 만기로 차입했고, 상환한 은행차입금보다 훨씬 많은 전환사채와 신주인수권부사채가 발행됐습니다. 사채의 발행금리는 최고 8%로 상환한 차입금보다 훨씬 높았습니다.
은행 차입금과 전환사채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은행 차입금은 만기가 되면 상환해야 합니다. 만기연장을 한다고 해도 언젠가는 갚아야 하고, 회사에서 현금이 빠져나갑니다. 현금이 없다면 투자했던 자산을 거두어 들여야 합니다. 하지만 전환사채는 상환 전에 주가가 전환가액 이상으로 올라 주식으로 전환되면 상환할 필요가 없습니다. 투자 실패로 전환사채 발행자금을 잃어도 부담이 별로 없습니다. 전환사채 투자자는 주가가 오른 틈에 시세차익을 얻고 시장에 팔아버리면 투자실패로 인한 손실은 다른 주주에게 떠넘겨집니다. 무자본 M&A로 상장사를 인수하는 기업사냥꾼들이 전환사채를 애용하는 이유입니다.
CBI는 2021년에만 유상증자도 두 차례나 했습니다. 9월에 운영자금 용도로 65억원, 12월에 80억원인데, 65억원은 지브이비티1호조합, 그로우스앤밸류, 그로우스앤밸류펀드유한회사 등 최대주주측에서 참여했고 80억원은 갭슐내시경 등 의료기기를 만드는 코스닥상장사 인트로메딕이 50억원을 출자한 싸이월드얼라이언스조합이 전액 인수했습니다.
왜 인트로메딕이었을까? 우연일 것 같지는 않습니다. CBI와 율호가 미국 바이오벤처 KINETA에 투자하는 과정에서 김성태 회장의 쌍방울그룹, 배상윤 회장의 KH필룩스그룹과 자금거래를 한 것처럼 인트로메딕 역시 또 다른 무자본 M&A 세력이 인수한 회사였으니까요. 인트로메딕은 2018년 2월 유상증자로 최대주주가 연우앤컴퍼니로 바뀌는데, 연우앤컴퍼니의 100% 지분을 가진 리미트리스홀딩스는 삼성전자 부회장을 지낸 이기태씨가 최대주주인 케이제이프리텍(현 이엠앤아이)에 투자했고, 이기태씨는 케이제이프리텍 지분을 마누스파트너스에 매각하는데, 마누스파트너스와 리미트리스홀딩스의 설립자는 김태훈이라는 동일인이었습니다.
리미트리스홀딩스는 저축은행 차입금으로 인터불스(현 참존글로벌)의 경영권을 인수하기도 했습니다. 이때 마누스파트너스도 동참하죠. 인터불스는 2019년 스타모빌리티로 상호를 변경합니다. 라임펀드 사기사건의 중심에 있던 그 회사입니다.
2021년에만 전환사채로 200억원, 신주인수권부사채로 170억원, 유형자산 매각으로 120억원, 유상증자로 145억원 등 600억원 이상을 조달한 CBI는 본격적인 투자에 나섭니다. 하지만 정작 투자처는 과거 청보산업의 본업이었던 자동차 내연기관 부품업을 위한 설비투자도, CBI가 새로 정관에 넣은 목적사업인 드론사업이나 수소연료전지를 위한 투자도 아니었어요.
첫 투자는 모두 알고 있다시피 미국에 자회사 CBI USA를 설립해 항암 신약개발업체 KINETA에 투자한 것이었죠. 회사를 인수한지 불과 4개월 만에 투자계약이 체결되었습니다. 상장사인 청보산업을 인수한 후 전환사채를 발행하고 곧바로 투자가 이루어진 것은 이 모든 것이 미리 계획된 시나리오였다는 뜻이겠죠.
KINETA 투자로 CBI는 큰 손실을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KINETA 투자를 위해 발행된 전환사채 투자자들은 CBI의 주가 급등으로 상당한 시세차익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로우스앤밸류가 인수하기 전 발행된 3회차 40억원, KINETA 투자를 위해 발행된 4~6회차 전환사채와 7~8회차 신주인수권부사채 등 총 410억원규모의 주식관련 사채는 거의 전부 주식으로 전환되었습니다. 신주인수권부사채는 지난해 2월과 4월에, 3회차 전환사채는 KINETA 투자 직후인 2021년 7월에, 4~6회차 전환사채는 지난해 3월에 집중적으로 전환청구권 또는 신주인수권 행사가 이루어졌습니다. 현재 미상환으로 남아 있는 건 6회차 전환사채 3000만원뿐입니다.
이후에도 CBI의 전환사채 발행과 신사업 명목의 타법인 주식 투자는 지속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핵산치료제 신약개발업체인 미국의 엑시큐어(EXICURE), 나노스(현 SBW생명과학), 대한방직, 대한그린파워(현 DGP), 율호 등입니다. KINETA와 마찬가지로 회사는 큰 손실을 입었습니다. KINETA와 EXICURE 투자를 담당했던 미국 자회사 CBI USA는 지난해 177억원, 올해 9월까지 28억원의 당기순손실을 기록했습니다.
CBI의 전환사채는 올해 8월 13회차까지 발행되었습니다. 설립 후 60년동안 딱 3번의 주식관련 사채를 발행했을 뿐인 청보산업이 새주인을 만난지 불과 2년 반만에 10번(신주인수권부사채 2회 포함)이나 발행을 한 겁니다.
CBI는 최근 텅스텐 개발로 눈길을 돌렸습니다. 지난 10월 3.6조원의 가치가 있는 광업권을 보유했다는 구보의 지분 46.88%를 100억원에 인수했죠. 인수대금으로 지난해 7월 발행한 120억원 규모로 발행된 9회차 전환사채 100억원을 건넸습니다. 1000원대초까지 떨어졌던 주가는 10월 중순 한때 2500원을 넘어설 정도로 급등했죠. 이 틈을 놓치지 않고 9회차 전환사채 100억원과 10회차 전환사채 60억원의 전환청구권이 행사되었습니다. 9회차 전환사채의 전환가액은 1731원이었죠. 이로 인해 365억원에 달했던 CBI의 미상환 사채는 200억원 아래로 줄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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