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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닥 상장사 피씨엘은 면역진단용 체외진단기 개발 및 제조를 위해 2008년 설립된 바이오 벤처입니다. 하지만 2019년 매출이 3581만원에 불과하고 80억원에 가까운 적자를 기록한 위기의 기업입니다. 당시까지만 해도 최대 연매출이 2012년 기록한 10억원에 불과했고, 7년간 누적 적자가 230억원에 달했습니다. 회사 운영자금이나 연구개발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유상증자와 차입을 한해 걸러 한번씩 해야 했습니다.
체외진단 전문업체였지만, 진단제품 매출은 거의 없었습니다. 대부분 매출은 임상시험 등을 위한 플랫폼서비스에서 나왔는데 그나마도 2017년 5억원이던 플랫폼서비스 매출이 1억원으로, 다시 3000만원대로 떨어지면서 매출공백 직전의 상태였습니다.
2020년 코로나 확산으로 인한 팬데믹이 피씨엘을 살렸습니다. 진단키트 주문이 봇물처럼 쏟아져들어왔고, 심지어 대부분 공급계약이 선입금 조건이었습니다. 피씨엘의 그해 매출은 537억원, 매출 증가율이 무려 1500배에 달했습니다. 영업이익은 257억원을 기록해 무려 8년간에 걸친 누적 영업적자(217억원)보다 많았습니다.
피씨엘의 진단키트는 주로 수출로 판매됐습니다. 코로나 기간 국내 판매는 미미한 수준이었죠. 하지만 팬데믹에서 벗어난 이후 수출이 급감하자 국내 판매를 늘려 매출축소를 최소화하고자 했습니다. 비록 2020년만은 못해도 2022년까지 피씨엘의 매출은 코로나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었습니다.
코로나 팬데믹 수혜는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지난해 9월까지 피씨엘 매출액은 고작 17억원에 그쳣습니다. 2020년 489억원에 달했던 신속진단키트 매출이 지난해에는 9월까지 15억원을 채우지 못했습니다. 신속진단키트를 대체할 매출품목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하늘이 준 기회와도 같았던 코로나 팬데믹으로 피씨엘에는 그 전에는 없었던 대규모 현금이 유입되었을 텐데요. 쓰지 않고 남아 있다면 바이오벤처인 회사가 몇 년간 버틸 수 있는 유동성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피씨엘은 코로나 수혜에도 불구하고 전혀 회사 내에 현금을 축적해 두지 못했습니다. 아니 오히려 있던 현금마저 다 써버렸습니다. 호황이 지속될 것으로 예상했던 걸까요? 피씨엘은 코로나 기간동안 신속진단키트 생산을 대규모로 늘렸고, 엄청난 매출증가만큼이나 팔다 남은 재고도 쌓여갔습니다.
피씨엘은 2020년 270억원 규모의 EBITDA를 창출했지만, 그보다 많은 274억원이 재고자산에 잠겼고, 결국 영업활동에서 23억원의 현금이 순유출(순사용)되었습니다. 결국 부족한 현금을 채우기 위해 80억원 규모의 랩금융상품 전부를 처분해야 했습니다.
2021년에는 461억원에 달하는 매출에도 불구하고 영업활동으로 인한 현금흐름은 오히려 162억원에 달하는 대규모 순유출이었습니다. 생산설비를 확충하고 원재료 등의 투입 역시 큰 폭으로 늘리는 등 전체적으로 비용이 크게 늘어나면서 매출원가가 매출액을 추월했습니다. 매출원가가 무려 3배로 늘었는데 매출액은 14% 감소하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2021년에 벌어졌습니다.
2021년 피씨엘의 순손실이 무려 317억원에 달했는데요. 3분의 1이 넘는 115억원이 신속진단키트 가격 하락으로 인한 재고자산 평가손실이었습니다. 게다가 재고자산이 늘어나면서 다시 83억원에 달하는 현금이 감소했습니다. 그렇게 코로나 수혜 2년간 피씨엘은 되레 185억원의 현금을 영업활동에서 까먹었습니다.
2021년부터는 외상매출 후 결제되지 않은 매출채권이 빠르게 쌓였습니다. 2021년에 25억원, 2022년에도 25억원의 매출채권이 쌓였습니다. 재고자산에 더불어 현금유동성을 줄이는 새로운 주범이 등장한 겁니다. 피씨엘은 그렇게 2020년 반짝 영업흑자를 기록한 뒤 3년 연속 적자 행진 중이고, 3년 9개월동안 영업활동으로 총 221억원의 현금을 순지출했습니다.
피씨엘은 현금흐름 부족을 채우기 위해 대대적인 자금조달에 나섰습니다. 코로나 기간의 매출 확대와 주가 상승이 있어서 가능했을 겁니다. 2021년 무려 568억원을 차입했고, 2022년과 2023년에 걸쳐 356억원의 유상증자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375억원 규모로 발행된 전환사채는 지난해 대부분 상환된 것으로 보입니다.
2020년 이후 피씨엘의 순조달은 총 562억원(차입 204억원, 증자 359억원)으로 추정됩니다. 같은 기간 자산총액은 500억원가량 늘었습니다. 2019년 155억원이던 회사 규모가 657억원까지 커졌지만, 벌어서 키운 게 아니라 자금조달로 키운 셈입니다.
새로운 수익원이 절실한 피씨엘은 2022년말 최대주주의 특수관계인인 ㈜올릭스가 121억원의 유상증자에 참여해, 그 자금으로 mRNA 백신 및 치료제를 개발하는 엠큐렉스 유상신주(지분율 36.9%)를 취득했습니다. 그러나 아직 매출이 발생하고 있는 곳이 아닙니다. 이 밖에 피씨엘이지, 골든바이오 등 2개의 종속회사가 있지만 매출이 없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엠큐렉스는 올릭스가 2021년에 51%를 출자해 설립한 곳인데, 의결권은 5% 미만이었습니다. 대부분 의결권은 올릭스의 최대주주이자 대표이사인 이동기씨에게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2022년 이후 지난해 9월말까지 매출은 3억5000만원 정도이고, 총 68억원의 누적 적자를 기록 중입니다. 피씨엘은 매출이 거의 발생하지 않는 신약 개발회사의 지분 36.9%를 120억원에 취득한 셈입니다. 피씨엘은 지난해 이중 40억원을 엠큐렉스에서 빌려쓴 후 상환했습니다.
이 거래가 가능했던 것은 올릭스의 대표 이동기씨와 피씨엘의 최대주주 김소연씨가 부부였기 때문입니다. 김소연씨는 올릭스의 주주이기도 했죠. 두 회사는 원래 올릭스가 엠큐렉스 지분을 피씨엘에 현물출자하는 방식으로 주식스왑을 하려다 금융감독원의 저지로 현금을 동반한 유상증자 방식으로 바꾸었습니다.
이 거래로 엠큐렉스는 올릭스와 피씨엘이 함께 지배하는 회사가 되었지만, 어느 한쪽의 자회사도 아닌 관계가 되었습니다. 엠큐렉스가 적자를 내면 양사의 지분법손실로 기록되지만, 어느 한 회사의 연결재무제표에 통째로 포함되지는 않습니다. 올릭스의 현금이 엠큐렉스로 옮겨졌지만, 연결 기준으로 올릭스의 실적은 개선된 것 같은 착시를 유발할 수 있습니다.
피씨엘은 신사업 투자는 제쳐두고라도 회사 운영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라도 추가 자금조달이 불가피했습니다. 지난해 9월말 현금 등 보유 유동성이 145억원으로 1년간의 운영자금으로도 빠듯했습니다. 영업활동에서 현금을 창출하기는커녕 까먹고 있는 형편이었으니까요.
결국 다시 자금조달에 나섰습니다. 이달 17일과 31일 각각 100억원씩 두 차례에 걸쳐 미국의 대체투자그룹으로 알려진 GEM(GEM Global Yield LLC SCS,)을 대상으로 제3자 배정 유상증자를 할 예정이죠. 덧붙여 김소연 대표는 자신의 보유 주식 중 529만주를 GEM에 매각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구주 매각 가격(주당 3500원)이 신주 발행가액(17일 3985원, 31일 3790원)보다 낮았고, 신주 발행가액은 각각 기준주가보다 1~2원씩 높았다는 점입니다. 신주 발행으로 주가가 희석되지 않았으니 기존 주주들에게 손해가 발생하지 않았고, 최대주주가 프리미엄을 받지 않고 지분을 매각한 것으로 미루어 향후 경영권 이전 가능성은 배제된 거래로 보입니다.
GEM은 유상증자 참여와 구주 인수로 18.4%의 지분을 취득할 예정입니다. 김소연 대표 부부 등 최대주주와 특별관계자 지분은 33.04%에서 20.7%로 하락하겠지만, 올릭스의 보유 지분을 포함하면 28%의 지분율을 확보하게 됩니다.
피씨엘은 GEM으로부터 조달한 200억원 중 100억원은 운영자금으로 쓰고, 100억원은 타법인 주식 등의 취득자금으로 사용할 예정인데요. 아무래도 매출 증가에 직접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 회사를 인수대상으로 물색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생산설비의 대량 확충 등 회사의 살림규모는 코로나 이전에 비해 커졌는데, 매출이 발생하지 않는 상황이 지속되면 기껏 마련한 목돈은 더욱 빠르게 바닥을 드러낼 것이고, 다시 유상증자나 차입을 반복해야 하는 입장에 처하게 될 테니까요. 게다가 토지와 건물을 포함한 생산설비와 투자부동산이 약 183억원에 이르는 은행 등 차입금의 담보로 잡혀 있어 운신의 폭이 좁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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