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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해액은 화재나 폭발 위험이 있는 소재여서 고객인 배터리회사들은 검증된 회사의 제품만 사용하는 경향이 강한데다, 대규모 투자가 지속적으로 필요해 진입장벽이 높은 시장입니다. 지속적으로 대규모 설비투자가 필요해 벤처기업이나 소기업은 도전하기조차 어렵고, 시장이 크지 않고 마진률이 낮아 대기업이 들어가기는 부적합한 시장이라고 하죠.


사실상 신규업체의 진입이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지던 전해액 시장에서 엔켐이 써온 성장 스토리는 놀라울 정도입니다. 세계 최대 배터리 시장인 중국에 먼저 진출해 경험을 쌓은 뒤 국내 시장에 역진출하는 전략을 선택한 엔켐의 매출은 창업 첫해인 2012년 3700만원으로 시작해 10년차인 2021년 2143억원으로 늘었고, 다시 1년만에 5000억원을 돌파합니다.



기업의 성장에는 자본이 필요하고, 성장하는 기업에는 자본이 몰리게 되어 있습니다. 엔켐의 성장에도 대박을 예감한 투자자들의 자본이 함께 했습니다. 2013년 한화그룹, 중소벤처기업진흥공단, KTB, 산업은행 등에서 10배수로 76억원의 투자를 받았고, 2016년에도 한화그룹, LB인베스트먼트, 송현 등에서 13배수로 95억원의 투자가 들어옵니다. 또 폴란드 법인의 설립이 이루어진 2018년에는 KB인베스트먼트 등에서 19배수로 150억원의 투자를 받습니다.


엔켐은 지난 2021년 11월 공모가 4만2000원으로 코스닥시장에 화려하게 입성합니다. 기업공개의 첫번째 이유는 아마도 지속적인 투자자금을 조달하기 위해서는 상장사라는 타이틀이 필요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엔켐은 시설자금 등 사업 확장의 밑천을 대부분 은행 등의 차입금이나 전환사채 등 부채로 조달해 왔고, 상장 직전인 2021년 6월 현금성자산이 33억원(별도 기준)에 불과했습니다.


차입금은 이미 과도하게 많았고 미국과 헝가리법인의 설비투자, 중국2공장 투자 등 대규모 투자가 진행중이었습니다. 대규모 자금 조달 그것도 차입금이 아닌 자본확충이 꼭 필요했죠. 상장에 실패했으면 투자는 장기간 지연될 처지였습니다. 실제로 엔켐은 코스닥에 상장하면서 구주매출이 전혀 없이 신주발행만 했고, 상장자금 950억원을 채무상환이 아니라 시설자금 등에 대부분 사용할 예정이었습니다.


엔켐의 자금조달과 성장가도가 평탄한 고속도로였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상장을 추진하던 중에 최대주주이자 대표이사인 오정강씨의 비리 의혹이 불거지고 2대 주주인 천보와 경영권 분쟁이 발생합니다. 천보는 엔켐이 창업했던 2012년부터 늘 함께 해 온 사업 파트너였습니다. 아니 단순한 파트너가 아니라 동지적 관계에 가까웠습니다.


오정강 대표는 구 제일모직에서 2차전지용 전해액을 개발한 연구원 출신이고, 천보의 설립자인이상률 대표는 구 동양화학공업(현 OCI) 연구원 출신입니다. 이상률 대표는 1997년 천보정밀, 2007년에 천보를 설립했고, 2012년 오정강 대표의 창업에 자금을 지원했습니다. 또 엔켐의 설립과 함께 천보는 2차전지 전해액 첨가제 사업을 시작하죠. 엔켐의 창업은 이상률씨의 자금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했고, 엔켐의 창업을 계기로 천보가 전해액 소재사업에 진출할 수 있었던 셈입니다. 천보의 전해액 소재는 엔켐에 공급됐고, 전기차 시장의 팽창과 2차전지 수요의 급증으로 엔켐과 천보의 동반 성장이 가능했습니다. 천보는 엔케보다 앞선 2018년 코스닥 시장에 주식을 상장합니다.


그런데 엔켐의 상장을 추진하던 2020년 천보가 오정강 대표의 횡령 의혹을 제기합니다. 전해액 원료를 구입하면서 리베이트를 챙겨온 것으로 의심된다며 거래내역 공개와 오정강 대표의 사퇴를 요구합니다. 오 대표가 물러나지 않는다면 추가 지분 매입으로 엔켐의 경영권을 확보하겠다는 입장을 보였죠. 반면 엔켐은 천보가 엔켐의 경영권을 갖기 위해 근거 없는 의혹을 제기하면서 기업공개를 방해하고 있다고 반박했죠. 결국 2020년 엔켐의 상장은 무산됩니다.


엔켐은 리튬염 등 전해액 소재의 공급처 다변화 또는 원재료 내재화를 추진했던 모양입니다. 당시 SK증권 보고서에 따르면 엔켐은 중국 리튬염업체 시다(Shida)에 지분투자(49%)를 하고 중국에 조인트벤처를 설립(2020년 6월)합니다. 2018년과 2019년에는 폴란드와 미국에 현지법인을 설립하고, 리튬염 생산설비를 구축해 첨가제 수요의 50%를 내재화할 계획을 세웁니다. 엔켐의 이러한 계획은 천보에 대한 높은 의존도를 크게 낮추는 결과로 이어질 것으로 예상할 수 있었습니다. 시다에 대한 투자가 경영권 분쟁의 직접적인 계기였다고 볼 수 있죠.


오정강 대표와 이상률 천보 대표와의 갈등은 두 사람의 지분율 문제에서 싹텄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리튬염 투자 등 시설자금이 필요했던 엔켐은 2019년 506억원의 대규모 전환사채(5회차)를 발행했고, 이때 등장한 새로운 주주가 아르케인인베스트먼트, 창인파트너서, 피에스캐피탈파트너스 등 벤처금융 3사였습니다. 번체캐피탈 3사는 공동업무집행조합원으로 브라만피에스창인 신기술사업투자조합 제1호(이하 브라만피에스창인투자조합1호)를 조성해 전환사채를 인수하는데, 오정강 대표는 사채액면총액의 최대 40%(약 202억원)까지 전환권을 행사할 수 있는 권리(Call Option)을 받습니다. 2019년말 현재 오정강 대표는 특수관계인과 함께 26.42%의 지분(보통주 기준)을 보유하고 있었고, 이상률 천보 대표는 특수관계인들을 통해 18.63%의 지분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런데 대규모 전환사채가 주식으로 전환되고 오정강 대표가 콜옵션을 행사하게 되면, 천보의 지분율을 크게 희석될 것이 뻔했고, 엔켐의 경영에 대한 영향력도 약화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행히 경영권 분쟁은 양측의 경영합의와 주주간 계약으로 종결됩니다. 천보측은 엔켐의 경영권확보 시도를 하지 않고 단순투자자로 남을 것을 약속하고, 오정강 대표의 이사선임과 대표이사직 유지에 협조하기로 하죠. 또 이상률 대표측이 지분을 양도할 때는 오정강 대표가 우선매수권을 갖기로 합니다.


 이런 합의가 있었기 때문이었을 거예요. 천보의 엔켐에 대한 매출은 2021년 다시 회복됩니다.또 엔켐이 2020년에도 206억원의 전환사채(6회차)와 110억원의 유상증자를 실시해 추가 자금을 조달하는데, 전환사채는 벤처금융 3사가 조성한 아르케피에스창인 신기술사업투자조합 제2호가 인수하고, 110억원의 유상증자에는 이상률 대표가 단독으로 참여합니다. 주주간 계약에 따라 천보측의 지분이 오 대표의 우호지분이 되었으니 가능했을 겁니다.



벤처금융의 투자조합들은 2020년 전환사채 전량을 보통주로 전환해 주주가 되고, 오정강 대표는 5회차와 6회차 전환사채에 대한 콜옵션 일부를 행사해 지분을 추가로 취득합니다. 이로 인해 상장 후 엔켐의 최대주주는 브라만피에스창인투자조합1호(22.18%)가 되고 오정강 대표는 아내인 박수정씨와 함께 18.93%의 지분율로 2대주주, 아상률대표는 자녀 둘과 함께 9.73%의 3대 주주, 아르케피에스창인투자조합2호가(7.01%)%의 4대 주주가 되죠. 하지만 오정강 대표는 전환사채 투자자들과 맺은 콜옵션 계약 등을 포함하면 실질 지분율이 25.73%에 달해 사실상 지배주주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오정강 대표는 벤처금융 3사와 주주간 계약을 통해 경영권 안정을 도모했습니다. 벤처금융 3사는 엔켐의 경영에 참여하지 않기로 약속했고, 의결권을 3년간 오정강 대표에게 위임했죠. 보유 주식을 매각할 때는 오정강대표에게 우선매수권이 있었고, 제3자에게 지분을 팔더라도 그 우선매수권이 따라다니게 되어 있었습니다.



오정강 대표가 경영권 안정에 크게 신경을 쓴 이유는 아마도 엔켐의 자금조달이 주로 전환우선주나 전환사채 등 최대주주의 지분을 희석하는 수단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게다가 엔켐은 상장 후 지속적으로 영업이익을 내고는 있지만, 현금흐름 기준으로는 매년 적자였기 때문에 지속적인 자금조달이 필요했고, 상환 부담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전환사채 등의 지속적인 발행이 불가피했을 겁니다.


그런데 엔켐의 잦은 전환사채 발행 등이 순전히 벤처기업의 자금조달 목적었나 싶은 정황들이 상장 이후 보이기 시작합니다. 엔켐은 상장 직후부터 신주인수권부사채, 전환사채, 전환상환우선주 등을 잇따라 발행하고 있는데 모두 소수 투자자들을 대상으로 한 사모발행이고, 두 차례의 추가 유상증자도 제3자배정 방식이었죠.


오정강 대표는 개인회사인 와이어트그룹을 설립해 엔켐의 콜옵션 행사를 사용하는데 활용하고, 광무와 중앙디앤엠 등 사업 연관성이 없는 한계기업을 인수합니다. 광무와 중앙디앤엠은 호재성 재료의 남발과 잦은 전환사채 발행과 최대주주 변경 등으로 주가등락이 심했고, 최대주주들은 기업사냥꾼으로 의심받았던 기업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