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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이노베이션이 채무불이행 리스크에 노출된 SK아이이테크놀로지를 흡수합병하는 것이 주주나 채권자의 이해관계에 매우 민감한 이슈라는 것을 SK그룹은 알고 있었을 겁니다. 그러니까 기준주가에 의한 합병비율 외에도 양사의 미래 현금흐름에 따른 수익가치를 외부회계법인을 통해 추정했고, 법무법인의 의견을 받았고, 특별위원회를 설치해 검토하도록 했겠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융감독원은 ‘중요한 누락 또는 허위 기재’를 이유로 정정명령을 내렸습니다. 매우 신중한 것처럼 보이는 회사의 검토 절차들이 실질적으로는 그렇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요?


이사회 의사록에 따르면, SK아이이테크놀로지를 위기에서 구하기 위해 모회사인 SK이노베이션의 보증, 대여, 증자 등의 자금조달 방안과 포괄적 주식교환, 흡수합병 등의 체제 개선 방안을 모두 검토한 뒤에 최선책이 흡수합병이라는 결론을 내렸다고 합니다. 보증, 대여, 증자 등의 자금조달은 적자가 누적되고 있는 SK아이이테크놀로지의 사업 측면이나 재무 측면을 고려할 때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 다시 말해 역부족이라고 판단했다고 하네요.



SK그룹은 공정거래법상 상호출자제한 기업집단입니다. 공정거래법 제24조에 따라 국내 계열회사 간의 채무보증이 금지됩니다. SK아이이테크놀로지의 해외 현지법인이 해외 금융기관에서 외화 대출을 받을 때 보증을 서는 등의 특례가 있기는 하지만, SK이노베이션이 국내 법인인 SK아이이테크놀로지의 국내 차입금에 대해 빚보증을 서는 건 불법입니다. 보증을 검토했다는데, 그 보증이 누구를 위한, 어떤 채무에 대한, 어떤 방식의 보증이었을까요?


자금대여는 법적으로 가능하지만, 법률적 제약이 있습니다. 우선 계열사에 돈을 빌려줄 때 금융시장의 정상적인 이자율을 적용해야 합니다. 또 자력으로 시장에서 차입이 불가능한 한계 계열사에게 모회사가 자금을 대여해 주는 행위는 그 자체로 전형적인 부당지원행위(공정거래법 제45조 제1항 제9호)로 판단될 위험이 있습니다. 적정한 이자를 받는다고 해서 그 리스크가 해소되지 않습니다.



증권신고서에는 SK아이이테크놀로지에 대해 ‘추가적인 차입 여력은 제한적’, ‘채무불이행 발생 리스크 존재’라고 써 있습니다. SK이노베이션의 자금대여는 공정거래법상으로는 부당지원행위 리스크, 상법 관점에서는 SK이노베이션 이사진에 대한 업무상 배임죄 및 주주충실의무 위반에 따른 손해배상책임 리스크로부터 자유롭다고 장담하기 어렵습니다.


증자도 그리 간단하지 않습니다. SK아이이테크놀로지의 결손 규모가 올해 6월말 현재 약 1조6,000억원(연결 기준)입니다. 1년 이내 갚아야 할 단기성 차입금은 1조 2,533억원에 달합니다. 올해 SK아이이테크놀로지는 장기사채 발행이나 장기차입금 조달이 전혀 없고, 단기차입을 늘려 돌려막기를 하는 중입니다. 코앞에 닥친 막대한 차입금 상환을 위해서는 증자규모가 상당한 수준이어야 합니다.


SK이노베이션은 SK아이이테크놀로지의 53.35% 지분을 보유한 주주입니다. SK이노베이션과 PRS 계약을 맺고 있는 엠에스파워제일차㈜가 8.55%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죠. 나머지 약 38%를 일반주주들이 보유하고 있는데, 장밋빛전망으로 상장한 후 낭떠러지에 떨어진 SK아이이테크놀로지를 위해 선뜻 지갑을 열 주주가 얼마나 될까요?


SK이노베이션의 경제사정도 넉넉하지 않습니다. 올해 6월말 현재 SK이노베이션 자체 차입금(별도 기준)이 10조원에 달합니다. 그 중 4조 6,000억원이 1년내 갚아야 할 차입금입니다. 그런데 보유하고 있는 현금은 약 1조 7,000억원에 그치고 있습니다. SK온을 지원하느라 등골이 휘어 SK㈜로부터 SK E&S 흡수합병이라는 지원을 받은 입장이잖아요. 주주들이 SK아이이테크놀로지 증자 지원에 과연 수긍해 줄지도 의문이지만, 그 이전에 증자를 해 줄 재원이 충분한지부터 확실하지 않습니다.



합병 외 다른 방안에 대해 얼마나 면밀한 검토가 이루어졌을까요? 증권신고서에는 보증이나자금대여의 법적인 제약에 대한 설명이 한 마디도 없습니다. 다만 자금대여에 대해 ‘부채비율 악화와 이자비용 증가로 이어져 근본적 재무구조 개선이 불가’하다고 했고, 출자(유상증자)에 대해서는 ‘SK아이이테크놀로지의 기존 주주의 주식가치 희석이 불가피’하다고 했습니다. 그 외 제3자 매각에 대해서는 매수인 확보가 어렵다, 포괄적 주식교환에 대해서는 ‘별도 법인으로 존속’하게 돼서 신용등급 하향 등을 막는데 도움이 안된다고 했습니다.


막다른 골목에 처한 계열사입니다. 당장 돈이 필요합니다. 부채비율 악화, 주식가치 희석 등은 너무 한가한 소리 아닌가요? 비용이 발생하지 않는 자금조달이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5,000억원이든, 1조원이든 긴급 자금대여나 유상증자를 했을 경우 SK아이이테크놀로지의 미래 자금사정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턴어라운드가 예상되는 2029년까지 버티려면 얼마만큼의 현금이 필요한지, 금융기관이나 시장에서 자금조달이 가능하려면 어느 정도의 재무개선이 필요한지 등 구체적인 수치와 시뮬레이션이 있어야 ‘검토를 열심히 했구나’ 하지요.


자금대여, 보증, 제3자 매각, 유상증자, 포괄적 주식교환 등의 선택지를 일일이 올려 놓은 것이 설마 일종의 소거법 논리 구축은 아니었겠지요? 이러이러한 대안을 검토해 봤는데, 그걸로는 안될 것 같아서 흡수합병을 선택했다는 논리적 징검다리로 활용한 것이 아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