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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27년 전 일이네요. 1993년 11월 대한민국 최초의 할인점 이마트 창동점이 개점합니다. 이명희 신세계그룹 회장이 미국에 체류하는 동안 유통시장의 지배자 월마트를 보고 들어와 할인점 사업을 시작했죠. 개점일 하루에 3만명 가까이 손님이 들고 매출 1억원 이상을 기록해 화제가 되었습니다. 신세계는 그후 매우 빠른 속도로 이마트 출점에 나섭니다. 97년 외환위기가 찾아오기 전 일산, 안산, 부평, 제주, 분당, 남원, 안양, 서부산 등에 이마트가 들어섭니다.
5년 후인 1998년 유통업계를 뒤흔든 큰 사건이 터집니다. 바로 월마트의 한국 진출입니다. 월마트가 한국 시장을 다 잡아먹을 거라며 유통업계가 호들갑(?)을 떨었지만 별다른 대응에 나서지도 못했죠. 유통시장이 개방된 것이 1996년이라 당시 국내 유통업계는 외국 기업과 경쟁을 해 본 적이 없는 우물 안 개구리였습니다. 월마트가 한국 유통시장을 점령하는 것은 시간 문제로 여겨졌습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일이 벌이 벌어집니다. 외환위기 중에도 공격적으로 부지를 매입하며 점포를 늘려가던 복제품 이마트의 벽을 원조 격인 월마트가 넘어서지 못하는 겁니다. 월마트에 이어 세계 2위 할인점인 까르푸도 상륙했지만 이미 전국에 점포망을 구축한 이마트에 밀려 힘을 쓰지 못합니다.
그리고 2006년 놀라운 일이 벌어지죠. 월마트가 국내 점포 16개 모두를 이마트에 넘기고 국내 시장에서 완전히 철수한 겁니다. 세계 유통시장의 지배자가 변방 작은 나라에 와서 제대로 발도 뻗어보지 못하고 쫓겨난 겁니다.
이마트가 월마트와 까르푸에 맞서 한판 전쟁을 벌이던 이 때는 다른 한편으로 유통시장의 중심이 백화점에서 할인점으로 넘어가는 유통산업의 패러다임 전환(paradigm shift)의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무서운 기세로 성장하는 할인점에 밀려 백화점들이 역사상 처음으로 매출이 줄어드는 역성장이라는 걸 경험하게 됩니다.
할인점 매출은 2003년 20조원을 돌파하며 백화점을 넘어서게 되고 이후로도 높은 성장을 이어가며 백화점과 격차를 벌여 나갑니다. 반면 백화점 매출은 2003년과 2004년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하죠. 그리고는 길고 긴 정체기를 맞게 됩니다.
15년도 더 지난 이야기를 굳이 꺼낸 것은 지금 오프라인에서 온라인으로 유통의 패러다임이 넘어가는 광경이 백화점에서 할인점으로 주도권이 넘어가던 모습과 사뭇 닮아 있어서입니다. 같은 유통이지만 백화점과 할인점은 엄연히 업태가 다르죠. 타깃 고객이 달라서 가격 정책도 다르고, 고객을 끌어들이는 소구 포인트도 다릅니다.
백화점이 패퇴하고 할인점이 승리한 것은 단지 업태간 경쟁의 결과물이 아니라 소비 문화의 변화로 볼 수 있습니다. 경제가 발전하면서 국민의 소득도 늘었는데 왜 비싼 백화점을 등지고 저가 할인점을 더 찾게 된 걸까요. 학자들은 선진국의 합리적인 소비문화가 국내에 전파된 결과라고 말합니다. 할인점이 선진국에서 먼저 확산되고 성장했으니 맞는 이야기 같습니다. 과시형 소비보다 알뜰 소비가 대세가 된 것이죠.
패러다임의 전환은 업태내 경쟁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성장이 끝난 백화점은 완전히 지금의 빅3(롯데, 신세계, 현대) 체제로 재편되면서 High-end 지향형으로 바뀝니다. 쉽게 말해 외국의 명품 등 더 비싼 물건을 진짜 부자들에게 파는 쪽으로 방향을 틀게 됩니다. 반면 승승장구하던 할인점(이마트, 홈플러스, 롯데마트)들은 전국적으로 점포를 늘려가며 양적 성장을 추구합니다. 재무지표로 비유하자면 백화점은 수익성 중심으로, 할인점은 매출액 중심으로 경쟁을 합니다.
그런데 할인점이 백화점을 누르고 유통의 중심으로 올라서고 15년이 지난 지금 백화점과 할인점의 희비가 다시 갈리고 있습니다. 백화점은 최근에도 여전히 성장이 정체되어 있지만 온라인 쇼핑의 맹공에도 불구하고 크게 흔들리지는 않습니다. 성장과 역성장을 매년 반복하며 같은 자리를 맴돌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래도 2018년에는 처음으로 시장규모 30조원대에 올라서는 성과를 냈습니다. 마치 온라인 쇼핑의 태풍이 빗겨가는 것처럼 빅3 백화점의 실적은 그렇게 나쁘지 않습니다.
이번 패러다임 시프트의 주된 희생양은 할인점입니다. 할인점 매출은 티몬 쿠팡 위메프가 활개를 치기시작하던 시기를 즈음해 성장세가 크게 꺾이더니 2018년에는 급기야 최초의 역성장을 경험합니다. 온라인 쇼핑의 성장과 극적으로 대비됩니다. 백화점이 굳건히 버티고 있는 모습과도 상당히 비교되지요.(위 그림에서 2016년 매출이 급감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면세점과 아울렛 매출을 별도로 추산하면서 생긴 착시입니다)
저가의 물품을 대량으로 구입하던 소비의 주체인 베이비부머가 은퇴하고 밀레니얼 세대와 Z 세대가 주요 소비자로 등장하면서 할인점이 급속히 힘을 잃고 있습니다. 로켓배송과 쓱배송이 가능해지면서 할인점의 주요 매출품목인 음식료품 등을 온라인으로 주문하는 시대가 열린 것이죠.
백화점을 누르고 유통의 중심에 선 할인점이 온라인쇼핑의 도전에 흔들리고 있습니다. 마치 역사의 아이러니 같습니다. 오프라인에서 온라인으로 소비문화가 바뀐다고 하지만 유통의 업태로 보면, 좁게는 온라인 쇼핑업체와 이마트, 홈플러스, 롯데마트로 대표되는 할인점의 전쟁입니다. 할인점 1위인 이마트를 보유한 신세계-이마트그룹이 에스에스지닷컴(SSG.com)을 출범시키며 먼저 대응에 나선 것도 그런 면에서 당연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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