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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화그룹이 100억 달러(14조3000억원, 달러/원 환율 1430원 기준, 이하 같음) 규모의 이라크 비스마야 신도시 프로젝트(Bismaya New City Project)에서 철수한 이유를 이라크 정부가 공사대금을 지연 지급하거나 미지급하는 등 계약을 위반했기 때문이라고 밝혔습니다. 이 공사는 2012년에 시작됐지만 이라크 내전으로 2015년~2017년 장기간 중단된 적이 있습니다. 또 2020년에는 코로나 사태 여파로 이라크 정부가 입국통제 등을 하면서 공사가 할 수 없는 상황이 됐고 그해 5월에는 한화가 공사대금 미지급을 이유로 공사를 중단했다는 보도가 나온 적이 있습니다.
몇 차례 정상화 논의가 있기는 했습니다. 지난해 이라크 정부가 밀린 공사대금 일부를 지급하면서 공사 재개에 대한 기대가 있었고, 올해도 양측이 정상화 논의를 시작했다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결국 한화가 사업 철수를 선언한 걸 보면 논의는 실패한 모양이죠. 하지만 양측이 협상 과정에서 어떤 조건을 내세웠는지, 그 조건들이 왜 합의에 이르지 못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게 없습니다.
지난 글에서 혹시 이라크 정부와 한화가 공사미수금과 한화-한화건설의 합병을 두고 감정싸움을 하는 건 아니냐 했지만, 정말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이라크 정부에게는 국가 재건이라는 중차대한 과업이고, 한화에게는 무려 14조원에 달하는 천문학적 돈이 걸린 프로젝트이니까요. 아주 철저하게 주판알을 튕겨 본 결과일 것입니다.
정확한 내막을 알 수는 없지만, 진실한 상황에 보다 접근하기 위해서는 사실과 맥락을 정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한화가 주장을 정리해 보면, 비스마야 신도시 프로젝트는 80억 달러 규모의 10만 주택 보급사업과 20억5200만 달러 규모의 인프라 사업으로 크게 나뉘는데, 10만 주택보급사업의 경우 3만채가 완성되었다고 합니다. 6월말까지 공사진행률은 주택보급사업이 44.99%, 인프라사업이 29%라고 합니다.
한화건설이 이라크 정부로부터 받은 돈은 선수금과 기성금을 합해 43억2200만 달러(6조1805억원)이라고 하고, 지난 6월말 현재 6억2900만 달러(8995억원)의 미수금을 계상하고 있습니다. 또 선수금과 미수금이 비슷한 수준이어서 상계 처리하면 손실이 발생하지 않을 거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현재 남은 선수금은 대략 6억~7억달러쯤 된다고 추정할 수 있고, 공사대금으로 수령한 기성금은 36~37억 달러 쯤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공사를 진행하는 중이라면 공사미수금이 쌓였다고 해도 선수금 전액과 상계할 수 없습니다. 선수금은 완공시까지의 공사 전체에 대해 지급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령 선수금으로 1000억원을 받았고 공사가 50% 진행된 상황에서 미수금이 1000억원이 쌓였다면, 선수금과 상계할 수 있는 미수금은 500억원(선수금 1000억원×50%) 뿐입니다. 하지만 계약 해지로 공사가 더 이상 진행될 수 없다면 미수금 전부를 상계할 수 있습니다. 선수금과 미수금을 상계하겠다는 한화측의 설명은 이에 근거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건 한화의 입장일 뿐입니다. 공사미수금 6억2900만 달러를 이라크 정부도 인지 또는 인정하고 있는 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한화건설의 재무제표에 그렇게 적혀 있으니 우리가 그렇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죠.
이라크 정부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현지 언론에 따르면 이라크 국가 투자위원회(NIC)는 지난 10일(현지시간) 공식 성명서를 발표했는데요. 2012년에 프로젝트를 수주한 한화가 약속한 공기(7년) 내에 공사를 끝내지 못했다며, 책임을 한화에 돌리고 있습니다.
또 공사비 조달과 관련해 이라크 정부가 사업비의 25%를 대고 나머지 75%는 한화가 자금조달을 담당하기로 계약이 이루어졌고, 계약서 서명 이후 25%에 해당하는 20억 달러를 모두 지불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20억 달러는 인프라 사업을 제외한 주택보급공사 80억 달러의 25%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또 중동 현지 언론인 자야(Zawya)지의 지난 11일 기사를 보면, 이라크 정부는 두 번째 낸 성명서를 통해 한화가 2012년 계약 체결 후 2년 이내에 1만500채의 주택을 인도하고, 2014년 이후 매년 2만2500채를 인도하기로 했지만, 2014년에 인도된 주택은 1,440채였고 총 인도된 주택은 2만400채인데, 그 중 9,000채는 미완성(incomplete)이었다고 주장했습니다. 한화 측이 밝힌 완공 주택 3만채와는 크게 다른 수치입니다.
한화의 입장에서는 3만채를 완공했으니 그 공정률에 해당하는 공사대금을 받아야 마땅하죠. 하지만 2만400채를 인도받았다고 주장하는 이라크 정부의 입장에서 지불해야 할 공사대금은 한화의 입장과 같지 않을 수 있을 겁니다. 좀 이상하긴 합니다. 인도받은 주택 중 하자가 있는 주택이 9000채라는 건 그럴 수 있다고 치겠는데, 인도받은 주택 수가 인도한 주택 수와 어떻게 다를 수가 있죠. 셈법이 다를 리도 없는데 말이죠.
주고 받아야 할 미수금에 대한 생각이 만약 다르다면, 선수금과 미수금을 상계처리하는 문제는 간단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한화그룹은 6억2900만 달러의 미수금 전부를 받겠다고 나서겠지만, 이라크 정부는 지불해야 할 미수금이 그 보다 적다고 맞설 수도 있으니까요.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매우 길고 소모적인 분쟁절차를 거칠 수 밖에 없을 겁니다.
이라크 정부의 주장 중에 주목할 부분이 있습니다. 사업비 조달과 관련해 계약 당시 이라크 정부가 25%, 한화가 75%를 담당하기로 했다는 대목입니다. 주택보급사업의 규모는 80억 달러인데, 계약 시점에는 그 보다 적은 77억5000만 달러였습니다. 계약에 물가상승을 반영한 공사대금 증액(Escalation) 조항을 포함하고 있어 최종적으로 80억 달러가 되었죠. 이라크 정부는 계약 직후 선수금 7억7500만 달러(10%), 2013년과 2014년에 1차 중도금과 2차 중도금 각각 3억8750만 달러(5%)를 지급했습니다. 국내 언론의 당시 보도에 따르면 그렇습니다. 선수금과 1,2차 중도금에 증액 조항을 적용하면 20억 달러, 계약금액 80억 달러의 25%가 됩니다.
이라크 정부는 나머지 75%에 해당하는 사업비를 한화측이 담당하기로 했다고 주장하지만, 한화가 사업비를 대기로 했다는 말은 아닐 겁니다. 이라크 국가 투자위원회(NIC)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이라크 재건사업을 위해 정부가 보증을 하는 사업이라며 투자자 유치를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비스마야 신도시 프로젝트 역시 이라크 국내외 금융기관이나 투자자로부터 사업비를 조달할 계획이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일종의 프로젝트 파이낸스겠지요.
올해 2월 NIC는 비스마야 주택보급사업 계약을 조사하기 위해 국제 법무법인과 회계법인을 고용합니다. 주요 조사 대상은 이 프로젝트의 자금문제에 대한 것이었고 새로운 자금 계획을 수립하는 것이 조사의 목적이었습니다. 이후 국내 언론에 NIC가 한화에 비스마야 신도시 사업 정상화 논의를 요청했다는 소식이 공교롭게도 ㈜한화와 한화건설의 합병을 결정한 7월 29일 전해지죠. 그리고 8월 NIC 의장은 공사 재개를 위해 "여러가지 법적, 재무적 조건을 명시했고 한화측의 답변을 기다리고 있다"는 내용이 현지 언론에 보도됩니다.
한화입장에서 공사 재개 협의을 거부할 이유가 없죠. 실제로 이라크 정부의 협의 요청이 있은 후 이미 예정된 다른 공사에 더해 내년에 비스마야 신도시 개발이 재개되면 한화건설의 실적이 대폭 개선될 것이라고 기대한다는 보도가 나옵니다. 하지만 그 사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10월 6일 NIC가 ㈜한화와 한화건설 합병에 부동의 의사를 전달해 오고, 한화는 지체없이 사업 포기를 선언합니다.
NIC가 비스마야 신도시 프로젝트에 대한 조사 후 제시했다는 '여러가지 법적, 재무적 조건'이 한화 입장에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내용이 포함되었을 것 같다는 짐작이 됩니다. 그런데 왜 그게 ㈜한화와 한화건설 합병 반대로 표출되었는지는 여전히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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