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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화건설이 이라크 비스마야 신도시사업에서 철수한다는 충격적인 결정을 했습니다. 비스마야 신도시사업은 이라크 국가투자위원회(NIC)가 전후 복구사업의 일환으로 발주한 것인데 그 규모가 101억 달러로 국내 건설사가 수주한 해외 공사 중 UAE 원전공사(400억 달러)를 제외하고 최대였습니다. 한화건설 창사 이래 전무후무한 프로젝트인 것은 두 말할 필요도 없죠.
비스마르 신도시사업은 크게 둘로 나눌 수 있습니다. 2012년 5월에 수주한 10만 가구 주택보급사업(80억 달러)과 2015년 4월에 수주한 교육시설, 병원, 경찰서 도로 등 소셜 인프라 사업(21.2억 달러)입니다. 기획부터 설계, 조달, 시공까지 모두 수행하는 디자인 빌드(Design-Build) 방식으로 건설되며, 한국형 신도시를 해외에 그대로 접목시킨 계획도시로 만들어지고 있다고 한화 측은 밝히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로 따지면 분당급 신도시 하나를 한화건설 혼자 새로 만든다고 봐도 과언이 아닌 초대형 사업이죠.
한화건설이 이라크 정부에서 이 공사를 처음 수주한 2012년은 국내 대형 건설사들이 중동 플랜트 사업에서 대규모 부실이 발생하면서 어려움을 겪던 시절이었습니다. 2008년 금융위기로 국내 주택시장에서 미분양 사태가 벌어지자 너도나도 중동 플랜트 시장에 진출했지만 저가수주와 경험 부족으로 큰 손실을 입어야 했죠.
그런 와중에 대형 건설사 축에 들지 못하던 한화건설이 주택사업으로는 단군이래 최대의 공사를 이라크 정부에서 수주한 건 큰 사건이었습니다. 게다가 한화건설은 2007년에 처음으로 해외시장에 진출한 후발주자였습니다. 비스마야 이전의 해외 수주 실적도 보잘 것 없었습니다. 비스마야 신도시사업은 한화건설의 큰 자랑거리이자 자부심이었을 겁니다. 지금까지도 이 사업이 중동의 다른 나라 등 해외 시장 개척의 거점이라고 말하고 있고, 김승연 회장이 직접 챙기던 사업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공사는 오랫동안 난항을 겪었습니다. 2015~2017년에는 이슬람국가(IS) 전쟁으로 지연이 되었고 2020년 이후에는 코로나 사태로 통행제한, 입국제한, 격리조치 등이 시행되면서 사실상 공사가 중단되었습니다. 필수인력 700명 정도만 남기고 현장에서 철수했다고 하더군요.
당초 2019년과 2020년 각각 완공 예정이던 공사는 2027년말로 멀찌감치 미루어 놓았습니다. 공사가 지연되면서 받지 못한 공사대금(공사미수금)도 6월말 기준 8136억원이 쌓였습니다. 한화 측에서는 공사 지연의 원인으로 이라크 주변의 정세 불안과 함께 미수금 문제도 들고 있습니다. 대금지급이 지연되자 한화건설 측에서 공사 재개를 하지 않은 모양이예요.한화건설은 지난 2018년에도 공사미수금 전액을 수령하고 IS 전쟁으로 중단된 공사를 다시 재개한 적이 있습니다.
불과 두 달 전까지만 해도 한화그룹은 이라크 정부와 비스마야 사업 정상화를 위한 협상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했었죠. 공사기간과 공사대금의 안정적 수금방안에 대한 내용이 협상에 들어 있었다고 합니다. 협상이 잘 마무리되었다면, 한화건설 실적에 큰 호재가 되었을 겁니다. 밀렸던 공사 대금을 받아 자금사정이 크게 좋아졌을 것이고, 공사를 재개하면서 공사수익(매출액)과 이익도 크게 늘었겠죠.
그런데 지난 7일 돌연 ㈜한화는 자회사 한화건설이 비스마야 신도시사업에서 철수하기로 했다고 공시했습니다. 이라크 정부의 공사대금 지연지급과 미지급 등 계약위반을 이유로 한화건설이 계약해지를 통보했다는 내용이었죠. 한화건설은 받지 못한 공사대금 약 6억2900만 달러를 계약상의 권리 행사와 분쟁 절차를 통해 최대한 회수하겠다는 입장입니다.
공사를 정상화하는 협상을 진행 중이라더니 왜 갑자기 계약해지를 한 걸까요? 협상이 결렬 됐다는 것이니, 공사대금 결제요구에 이라크 정부가 응하지 않았거나 공사기간 연장을 놓고 양측의 입장이 좁혀지지 않았던 건가요? 그렇다고 창사 이래 전무후무한, 현재 공사 잔액만으로도 총 수주잔고(6월말 기준 약 23조원)의 30%가 넘는 공사를 포기한다고요?
비스마야 사업 철수는 이라크 정부와 한화 양 측에 기회비용이 엄청날 겁니다. 이라크 정부는 새로운 사업자를 찾아 공사를 재개하는 절차를 다시 밟아야 하고, 한화그룹 입장에서는 밀린 공사대금을 언제 얼마나 회수할 지 불확실할 뿐 더러, 그 동안 한화건설의 대표적인 공사실적을 잃게 됩니다. 중동 등 해외시장에서 공사를 포기했다는 평판 리스크까지 떠안아야 합니다.
비스마야 사업 철수에는 다른 내막이 있었습니다. ㈜한화가 사업철수 공시를 한 날 한화건설도 하나의 공시를 하는데요. 바로 한화와 합병 공시에 대한 수정공시였습니다. 이 공시에는 공사대금 미지급이 아닌 전혀 다른 계약 해지의 이유가 적혀 있습니다.
한화건설은 다음달 1일을 기일로 그룹의 최상위 지배회사인 ㈜한화에 합병됩니다. 일각에서는 합병이 한화건설을 크게 성장시킬 계기가 될 거라고들 합니다. ㈜한화의 자회사가 아닌 ㈜한화의 이름으로 나서면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 수주기회가 대폭 확대된다는 겁니다.
㈜한화가 한화건설을 합병하게 되면, 한화건설이 하던 주요 공사를 ㈜한화가 승계하게 됩니다. 해외 현장에서 진행되는 공사의 계약상 지위와 권리 및 의무를 승계하기 위해서는 발주처의 동의가 필요합니다. 한화건설은 비스마야 사업을 모회사에 승계하기 위해 이라크 정부와 합병에 대한 협의를 해 왔겠죠.
한화와 한화건설 이사회가 합병을 결정한 날은 지난 7월 29일입니다. 한화건설이 이라크 정부와 비스마야 사업 정상화 협상을 한다고 처음 보도된 날이 공교롭게도 같은 날입니다.이라크 정부가 공사 재개에 대한 협상을 하자며 공문을 보내왔다고 합니다.협상의 시작이 이라크 정부의 요청에 의한 것이라고 하지만, 한화와의 합병도 협상 내용 중 하나였을 것은 분명합니다. 이라크 정부가 동의를 해 주어야 ㈜한화가 한화건설의 계약상 지위와 권리를 승계할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이라크 정부는 지난 6일 ㈜한화와 합병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의사를 한화건설에 전달합니다. 그러자 한화건설은 7일자로 비스마야 사업에 대한 도급계약을 해지한다는 통지를 이라크 정부에 보냅니다. 물론 합병에 반대해서 계약을 해지한다고 보내지는 않았죠. 공사대금을 미지급한 것이 계약 위반이라며 해지를 합니다. 하지만, 한화건설은 합병 반대에 대해 계약 해지로 대응을 한 겁니다.
이해가 잘 안되네요. 이라크 정부는 왜 ㈜한화의 한화건설 흡수합병을 반대한 걸까요. 어차피 한화가 한화건설의 100% 자회사라 실질적인 사업주체가 달라지는 것도 아니고, 합병으로 인해 공사에 문제가 생기거나 계약조건을 바꾸어야 하는 게 아닐 텐데 말이죠. 합병에 동의해 주지 않는다고 계약 해지로 대응을 한 한화건설도 이해가 안됩니다. 합병을 하더라도 공사에 지장이 생기지 않는다는 걸 잘 설득하면 되지 않나요?
김승연 회장이 직접 나서서 챙길 정도로 정성을 기울였던 비스마야 공사를 한화건설이 자체적으로 포기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룹의 최고 의사결정자가 재가했거나 직접 결정했을 가능성이 높죠. 비스마야 공사 재개 협상의 가장 큰 쟁점은 밀린 공사비였다고 하던데, 혹시 양측이 공사비 문제로 날을 세우다 한화그룹의 합병을 놓고 감정싸움을 벌이는 건 아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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