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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양금속이 영풍제지를 인수한다는 소식에 시장에서 보인 첫 반응은 '시세보다 싸게 샀다'였습니다. 대양금속은 주당 1만1488원에 경영권 지분을 인수했는데, 자본시장법 시행령을 준용해 산정한 기준시가(1만3502원)은 물론 양수도계약 전날 종가인 1만3050원보다 낮았습니다.
영풍제지 인수가격에 대해 외부평가를 맡았던 동현회계법인에 따르면 국내 상장사의 지난 3년간 300억원 이상 경영권 지분 양수도 거래(비교가 부적절한 거래 제외) 78건의 단순평균 프리미엄은 43.78%에 이릅니다. 경영권 프리미엄이 최소인 사례는 2019년 11월 비비안(-40.69%)이고 최고 프리미엄은 2021년 9월 클라우드에어(224.08%)였습니다.
경영권 프리미엄이 없는 거래가 아주 드물지는 않습니다. 16건이 경영권 디스카운트가 적용된 거래였으니 대략 5건 중 1건에 해당합니다.. 하지만 그럴 만한 각각의 사정이 있기 때문이죠. 회사가 망하기 직전이거나 양수자와 양도자가 모종의 관계이거나 기준가격 자체가 높게 결정됐거나 하는 등입니다.
경영권 거래가 워낙 제각각이어서 프리미엄의 적정 수준이 있는지, 있다면 어느 정도인지 모르겠습니다만 보편적으로는 기준주가에 비해 상당한 웃돈을 얹어 거래됩니다. 웃돈이 붙지 않았다면 우리가 모르는 상황이 있다고 봐야 겠습니다.
영풍제지는 코로나19 기간에 매출이 늘었지만 영업이익이나 상각 전 영업이익(EBITDA)은 다소 줄었습니다. 하지만 마진이 줄어서 경영권에 프리미엄이 붙지 않았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프리미엄이 세게 붙은 다른 회사들 중에는 실적이 영풍제지보다 훨씬 부진한 기업들이 많거든요.
영풍제지는 지속적으로 흑자를 내고 있고, 부채비율(49.73%, 연결기준 이하 같음)이 낮고 순차입금도 163억원으로 자산(1990억원)에 비해 많지 않습니다. 증자나 전환사채 발행도 거의 없이 수익창출로 자본을 키워 성장한 회사입니다. 주주가 납입한 자본은 300억원에 불과하고 이익잉여금이 1000억원이 넘으니까요. 현금흐름도 양호하고 유동성도 부족해 보이지 않습니다.
영풍제지의 대주주(그로쓰제일호투자목적주식회사)는 상당한 차익을 챙겼습니다. 2015년 650억원에 사들인 주식 전량을 1289억원에 팔았으니 640억원을 남겼습니다. 2020년 10월까지만 해도 영풍제지 주가는 3000원대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해 말부터 대량거래와 함께 급등해 5000원대로 올라섰고 지난해 말에는 7000원대 후반에 주로 거래되었습니다. 경영권 양수도 계약을 앞두고 주당 1만5000원까지 오르기는 했지만, M&A 재료가 반영된 주가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요. 최근 한달 간의 주가로 결정되는 기준주가가 적정한 기업가치를 반영한다고 보기 어렵다는 말입니다.
그로쓰제일호투자목적회사가 영풍제지의 대주주가 된 배경에는 드라마 같은 스토리가 숨어 있습니다. 영풍제지 창업주인 이무진 회장(1934년생)은 2002년 장남을 대표이사에 앉혀 기업 승계작업을 진행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장남이 2009년 회사를 그만 두고 지분도 청산합니다. 이 회장이 경영일선에 복귀하고 차남을 등기이사에 선임합니다. 하지만 차남 역시 2012년 3월 임기가 끝나자 형을 따라 회사를 떠납니다.
형제가 떠나고 갑자기 등장한 사람이 노미정(1969년생) 부회장입니다. 2011년 이 회장과 혼인신고를 한 배우자로 회사를 떠난 장남보다 12살 어립니다. 노 부회장은 2012년 2월 등기이사 겸 부회장이 됩니다. 2013년초 이 회장은 자신의 지분 전부(51.28%)를 노 부회장에게 증여합니다. 이 회장의 두 아들 대신 부인에게 경영권을 승계한 겁니다.
영풍제지를 손에 넣은 노 부회장은 불과 3년 만에 지분 50.54%를 큐캐피탈파트너스가 운영하는 그로쓰제일호투자목적회사에 650억원을 받고 매각합니다. 하지만 영풍제지에서 손을 뗀 건 아니었습니다. 그로쓰제일호투자목적회사에 34.48%의 지분을 출자한 이가 바로 노 부회장이었습니다. 이무진 회장에게서 수증한 영풍제지 지분 일부를 현금화하고 나머지는 자신이 대주주로 참여한 장부상 회사에 넘긴 셈입니다. 노 부회장은 또 지분 매각 후에도 3.9%의 영풍제지 지분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노미정씨는 이후 노성현으로 개명했습니다, 노성현씨는 지난해 5월 보유 중이던 영풍제지 주식 86만여 주 중 46만여 주를 주당 6100원에 시간외매매로 처분했습니다. 소송관련으로 질권을 풀기 위한 매각이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노 부회장은 그로쓰제일호투자목적회사가 대양금속에 지분을 매각한 후에도 여전히 2.9%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큐캐피탈파트너스는 업무집행사원(GP)이지 영풍제지의 실질적 주인이 아닙니다. 영풍제지의 대주주인 그로쓰제일호투자목적회사의 최대주주는 '큐씨피중소중견그로쓰2013'라는 사모펀드이고 큐캐피탈파트너스는 이 펀드에 8.42%를 출연한 최다출자자일 뿐이죠.
그로쓰제일호투자목적회사는 580억원의 자본과 75억원의 차입금으로 조성되었으니 노성현(노미정)씨의 출자금은 200억원, 큐씨피중소중견그로쓰2013의 출자금은 380억원이 됩니다. 이 중 큐캐피탈파트너스의 지분은 32억원어치이고, 나머지는 다른 곳에서 흘러 들어온 셈입니다.
게다가 그로쓰제일호투자목적주식회사의 보통주는 모두 노성현씨 몫이었습니다. 사모펀드 큐씨피중소중견그로쓰2013의 출자는 우선주로 이루어졌습니다. 영풍제지를 매각한 이도 노성현씨였고 실질적인 인수자도 노성현씨였던 셈입니다. 사모펀드는 재무적 투자자들의 집합이라고 봐야겠죠.
영풍제지를 매각할 당시 큐씨피중소중견그로쓰2013의 출자자는 산업은행(지분율 50%)과 큐캐피탈파트너스를 포함해 12인입니다. 과학기술인공제회, 전문건설공제조합, NH농협은행, 농협중앙회 등 다수의 기관투자가들이 자금을 집행했습니다. 큐씨피중소중견그로쓰2013은 1900억원 규모의 블라인드펀드로 조성되었는데 서진오토모티브 자회사 2곳, 옐로오투오 등에도 투자했다가 성공적으로 수익실현했고 마지막 남은 자산이 영풍제지였습니다.
그로쓰제일호투자목적㈜는 지난해 11월 임시주주총회를 열어 큐씨피중소중견2013 펀드에 210억원의 차등이익초과 분배금을 지급했습니다. 큐씨피중소중견2013 펀드는 현재 청산과정을 밟고 있습니다.
노성현씨는 이무진 회장에게서 증여받은 영풍제지 지분을 2015년 그로쓰제일호투자목적회사에 매각했지만, 진정한 엑시트(exit)는 올해가 되는 셈입니다. 2015년에 자신이 200억원을 출자한 그로쓰제일호투자목적회사로 650억원에 매각했으니 450억원의 현금을 확보했고, 올해 다시 1289억원에 지분 매각을 했으니 차입금 상환 후 배분을 해도 대략 400억원 가량을 추가로 확보할 것 같습니다. 물론 재무적 투자자에 대한 추가 분배금의 수준, 큐캐피탈파트너스에 지급할 보수, 양도차익에 대한 세금에 따라 실제 수령액은 그 보다 적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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