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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온의 지난해 프리 IPO는 회사가 기대한 최상의 시나리오도, 차상의 시나리오도 아닌 것 같습니다. 최상의 시나리오였다면 최소한 주식가치 30조원 이상으로 평가를 받고, 그 수준에서 충분한 투자자 유치가 이루어졌을 겁니다. 기대치를 20조~25조원 수준으로 낮추었다고 해도 유상증자 규모 2조8243억원의 대부분인 2조원을 모회사인 SK이노베이션으로 채우고 재무적 투자자가 전환우선주로 발행된 일부만을 인수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주당 5만5000원의 가치를 인정하고 들어온 외부 투자자는 전체 유상증자 규모의 29.2%에 그칩니다.
SK온이 주당 가격을 더 낮게 제시했다면, 더 많은 외부자금을 유치했을 수도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죠. SK이노베이션에서 물적분할을 하면서 무려 3조원이 넘는 현금을 몰아준 지 불과 1년여가 지났을 뿐이지만, 프리 IPO 성격의 유상증자에 다시 SK이노베이션이 추가로 2조원을 투입해 주당 5만5000원의 몸값을 고수했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더 이상 양보할 수 없는 마지노선이었나 봅니다.
SK이노베이션은 2조원의 유상증자 대금을 어떻게 납입하는 걸까요. 일단 지난해 12월 1조원을 납입했고 이달 안으로 1조원을 추가 납입해야 합니다. 보유 현금으로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일까요. SK이노베이션의 보유 현금(단기금융상품 포함, 이하 같음)은 물적분할 직전인 2021년 9월30일 기준 3조원에 달했습니다. 하지만 현금의 대부분을 SK온에 몰아 주면서 그해 말에는 1조원 정도로 줄었죠. 이후 다소 늘기는 했지만 가장 최근의 재무제표인 지난해 3분기말 현재로는 약 1조2000억원 수준입니다.
물론 4분기에 영업활동에서 추가로 현금흐름이 발생했을 겁니다. 하지만 물적분할 등의 영향으로 SK이노베이션 자체의 현금흐름 창출능력은 크게 줄어들었습니다. 2020년 1조8000억원대, 2021년 1조원 가량의 영업활동 현금흐름을 창출했지만 지난해에는 3분기까지 5000억원 수준에 그쳤습니다. 영업이익도 줄었지만, 유무형자산이 분할로 SK온 등에 넘어가면서 감가상각비 효과도 줄었고 운전자본(매출채권이나 재고자산 등)을 이용한 현금흐름 창출도 어려워졌습니다.
물적분할 이전에 한껏 당겼던 배당금도 줄었습니다. 2020년에는 SK에너지에서 3000억원, SK지오센트릭(구, SK종합화학)에서 7000억원, SK루브리컨츠에서 5000억원, SK트레이딩인터내셔널에서 4000억원 등 종속기업과 관계기업 등에서 수령한 배당금이 2조원에 육박했습니다. 2021년에도 SK루브리컨츠 5500억원, SK트레이딩인터내셔널 3500억원 등 약 1조원의 배당금이 유입됐죠. 하지만 지난해엔 SK루브리컨츠 2647억원 등 3분기까지 2745억원의 배당금만 받았습니다. 4분기 중 자회사 등으로부터 추가로 배당금을 받았을까요? 그 가능성은 높지 않을 겁니다. 중간배당이나 분기배당을 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배당금은 대체로 상반기 중 지급됩니다. 주주총회에서 배당결의가 이루어져야 할 수 있으니까요.
SK이노베이션은 지난해 12월 총 2조원의 SK온 유상증자 대금 중 1조원을 납입했는데, 이것 만으로도 가용 현금의 대부분을 썼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로 인한 재무적 압박이 상당히 심할 것 같습니다. SK온만 갚아야 할 차입금이 불어난 게 아니라 SK이노베이션도 단기적인 차입금 상환 부담이 매우 커졌거든요.
SK이노베이션의 차입금(사채 포함)은 지난해 9월말 현재 약 2조원 정도인데요. 2021년까지만 해도 대부분 장기성 차입금이었지만 지금은 만기가 매우 단기화 되었습니다. 지난해 9월말 기준으로 1년내(올해 9월까지) 갚아야 할 차입금이 1조2000억원이 넘습니다. 지난해 말 이미 1조원을 SK온에 출자했고, 올해 1월에 다시 1조원을 납입해야 하는 상황이니 여유 부릴 수 있는 입장이 못됩니다.
물론 사채와 차입금 대부분을 차환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지난해 11월 부동산PF시장이 급속히 경색된 것처럼 금융시장의 여건이 늘 기업이 바라는 대로 되지는 않거든요. 게다가 현금흐름도 줄었고 보유 현금도 바닥을 보이고 있다면, 설사 차환이 가능하다고 해도 조달 조건이 크게 불리해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미 시장의 금리가 크게 올라 있는 상황이라 기존의 차입금을 조달할 때와는 이자부담이 비교가 되지 않을 겁니다.
SK이노베이션은 꽤 안정적인 영업활동 현금흐름을 창출하는 기업으로 인정이 됩니다만, SK온을 물적분할 한 후에도 벌써 2조원의 증자에 참여하는 등 배터리 부문에 대한 예정된 투자(약 14조원)에 직접 나설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특히 대부분 차입금이 만기도래하는 올해 상당한 재무적 압박에 시달릴 것 같습니다. 지난해 SK온의 프리 IPO가 성공적으로 끝났다면 재무 압박은 훨씬 덜할 수 있었겠죠. 하지만 프리 IPO가 사실상 실패로 돌아가는 바람에 자칫하면 신용등급의 추가 하락까지 걱정해야 할 수 있습니다.
SK이노베이션의 장기 신용등급은 2021년 AA+에서 AA(안정적)으로 하락했습니다. 등급전망이 '안정적'이지만 프리 IPO의 실패로 빨간 불이 들어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신용평가사들은 SK이노베이션이 대단히 큰 투자부담으로 외부차입이 불가피할 것으로 예상하면서도 등급전망을 안정적으로 주었는데, 안정적인 영업현금 창출과 SK온의 프리 IPO로 인한 자본확충으로 재무부담을 일정 수준에서 제어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죠.
신용평가사들은 모두 SK온의 프리 IPO가 SK이노베이션의 재무적 부담을 상당부분 경감시켜줄 것으로 예상했고, 특히 한국기업평가는 SK온의 프리 IPO가 실질적인 자본유치일지를 모니터링하겠다고 했었습니다. 지금쯤 신용평가사들은 꽤 신경이 쓰일 겁니다.
한국기업평가는 SK이노베이션의 순차입금이 EBITDA의 4배, NICE신용평가는 좀 더 관대하게 순차입금이 EBITDA의 5배를 초과할 경우 신용등급의 추가 하향조정을 검토한다는 입장입니다. 개별 재무제표 기준이면 벌써 간당간당합니다만 다행히(?) 연결 재무제표 기준입니다. 지난해 9월말 현재 연결 기준 순차입금은 전년말 대비 5조원 가량 늘어난 15조4800억원에 달하지만 EBITDA가 6조원에 육박하고 연간기준으로 더 늘어날 것을 생각하면 아직 여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올해 양상이 달라질 수도 있습니다. 부족한 수준의 프리 IPO는 그렇지 않아도 빠르게 늘고 있는 차입금의 증가세를 가속화시킬 수 있죠. 여기에 보유 현금이 투자로 사라지면 순차입금이 커지게 됩니다. 예년보다 월등히 많은 EBITDA가 평년 수준으로 줄어들기라도 한다면 신용평가사들이 잡아 놓은 신용등급 하향조정 검토 기준을 순식간에 터치할 수도 있습니다.
SK이노베이션 입장에서 바람직한 방향은 SK온의 배터리 사업이 빠르게 성장해서 막대한 투자부담을 스스로 소화하는 것일 테지만, 현실적으로 어렵다면 추가 프리 IPO를 빠르게 추진하는 것을 고려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미 지난해 프리 IPO를 하면서 동일한 조건으로 재무적 투자자를 유치할 길을 열어 두었죠.
주주간 계약에서 SK온이 2026년말까지 업공개를 하지 못하면 전환우선주를 인수한 재무적 투자자들이 풋옵션을 행사할 수 있다는 조항이 있습니다만 그건 별로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고의나 중과실로 IPO를 완료하지 못한 경우에만 풋옵션 행사가 가능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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