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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채 시장은 수십 년째 악순환 중입니다. 2000년대 초반만 해도 이른바 투기등급 채권이라고 하는 BB급 회사채가 심심치 않게 발행되었고, 단위 농협이나 새마을금고 등 준 리테일 시장에서 주로 소화되었습니다. 국민연금과 공모펀드는 투자등급 중 낮은 등급인 BBB급 회사채를 매입해 수익률을 높이기도 했죠.


하지만 지금은 공모로 발행되는 투기등급 채권이 전무한 것은 물론이고, 투자등급인 BBB급 채권도 눈을 씻고 보아도 찾기 어려울 지경입니다. 예외적으로 BBB급 회사채가 가뭄에 콩 나듯 나오기는 하지만 기관투자가들이 찾는 채권은 아닙니다. A급 이상의 신용등급이 아니면 한번에 100억원 이상을 발행하기가 거의 불가능합니다.


투기등급 회사채가 발행되던 시절에는 회사채로 조달한 자금을 바탕으로 성장해 투자등급으로 올라서는 라이징 스타(Rising Star)들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물론 BBB급에서 A급으로 오르는 기업들도 있었죠. 신용등급이 오르면 더 많은 자금을 더 길게 회사채로 조달할 수 있게 되고, 그렇게 마련한 자금은 기업이 더 큰 성장을 일구어 낼 수 있는 발판이 됩니다.


이제는 라이징 스타는 고사하고, BBB급에서 A급으로 올라서는 기업을 보기도 어렵습니다. 어쩌다 신용등급이 한번 하락하기 시작하면, 다시 올라오기도 어려워졌습니다. 재기를 하려면 돈이 필요한데, 등급이 떨어지면 조달할 수 있는 자금의 규모가 크게 하락할 뿐 아니라 금리는 엄청 높아지거든요. 높은 금리를 감수한다고 해도 회사채 발행 자체가 불가능한 게 보통입니다.


회사채 시장이 성장자금 조달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건 아닙니다. 애플의 경우 배당과 자사주 매입 등 주주환원 재원을 회사채 발행으로 마련합니다. 애플 회사채 발행 잔액이 무려 1200억 달러(약 150조원)에 달합니다. 지난해 배당금 지급에 148억 달러를 썼고, 자사주 매입에 894억 달러를 지불했습니다. 애플만 그런 게 아닙니다. 초일류 글로벌 기업에서 흔하게 보이는 현상입니다. 오죽하면 "주식을 전부 갚아 버릴 모양"이라는 소리까지 나올 정도입니다.


애플이 돈이 없어서 회사채 발행으로 빚을 내서 배당을 하고 자사주를 매입할까요? 전혀 아니죠. 현금성 자산과 장단기 금융상품을 포함해 2900억 달러에 달합니다. 전에는 해외 유보금을 회수하려면 높은 세금을 내야 했지만 2018년 이후 해외 자회사에서 받는 배당금이 과세표준에서 제외되어 걸림돌이 사라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플은 매년 회사채를 발행하고 있습니다.


국내 기업에게는 상상할 수 없는 모습이죠. 삼성전자나 현대자동차가 주주에게 배당을 하기 위해 회사채를 발행한다고 하면, 자금난에 빠진 거 아니냐며 한바탕 소란이 벌어질 지도 모르죠. 언론에서는 무리한 배당이니, 주주환원 부담이 기업의 발목을 잡는다느니 흰소리들을 할 겁니다.


회사채를 발행해 자사주 매입을 하면 기업에게 이득입니다. 자기자본에 드는 비용이 타인자본에 드는 비용보다 비싸거든요. 이자비용은 배당금과 달리 세금 절감 효과가 발생하니까요. 주식 수가 줄어들면 주가는 상승할 테니 주주도 반길 일입니다.


주주환원을 회사채 발행자금으로 하니 애플은 유보자금을 고스란히 투자에 사용할 수 있습니다. 더 좋은 투자기회를 경쟁사보다 더 빨리 더 많이 잡을 수 있죠. 반면 국내 기업은 유보자금으로 투자도 하고 주주환원도 해야 하니 투자는 한발 늦고, 주주환원은 부족합니다.


국내 회사채 시장의 크기는 약 245조원 정도입니다. 애플이 발행한 회사채의 60% 정도 되나 봅니다. 국내 채권시장(약 2600조원)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0%가 채 되지 않고요. 만기도래하지 않은 회사채가 있는 기업은 어제(3월 15일)일 기준으로 4302개사로 집계됩니다. 상당히 많은 것 같지요? 실상을 알고 나면 그런 생각이 사라질 겁니다.


공모시장에서 회사채를 발행한 기업(신종자본증권 제외)은  고작 277개사에 불과합니다. 자체적으로 사모 회사채를 발행한 기업도 278개사(신종자본증권 제외)밖에 되지 않습니다. 신종자본증권(공,사모 포함)을 발행한 기업은 30개사입니다. 나머지 3,930개사는 신용보증기금 등에서 자체 신용으로는 회사채 발행이 어려운 중소기업 등의 자금조달을 돕기 위해서 정책적으로 마련한 프라이머리 CBO(이하 P-CBO) 프로그램을 통해 회사채를 발행했습니다. 4302개사 중 공모채(신종자본증권 제외)가 없는 기업이 4025개사입니다.



사모든 P-CBO든 회사채를 발행하면 된 것 아니냐고 할 수 있지만, 그게 그렇지가 않습니다. 공모채와 비교하면 만기가 짧고 발행규모도 현저히 적습니다. 공모시장에서는 277개사가 187조원을 조달한 반면 사모시장에서는 278개사가 19조원을 조달했을 뿐이고, 3930개사가 P-CBO로 조달한 자금은 16조원에 그칩니다. 공모 회사채는 평균 1004억원 규모로 발행되지만, 사모는 평균 258억원, P-CBO는 평균 29억원에 불과합니다.


사모 회사채나 P-CBO를 통해서는 대규모 자금을 장기적으로 조달하기 어렵습니다. 기업의 성장을 뒷받침하기 부족할 뿐 아니라 발행한 지 1년만 지나도 상환걱정을 해야 하는 경우가 일반적입니다. 다만, 금융기관에서 차입할 때와 달리 담보를 제공하지 않아도 된다는 이점은 있죠.



공모 회사채 시장은 귀족 기업들의 놀이터입니다. 최소한 A등급 이상의 우수한 신용을 갖춘 기업만이 놀이터에 입장할 수 있습니다. BBB등급도 신용이 준수한 기업들이어야 받을 수 있는 투자등급이지만, 공모 회사채를 발행한 기업은 20개사에 불과합니다. 신용등급이 하락해 부도가 우려되거나 준부도상태인 기업을 제외하고는 이른바 투기등급이라고 하는 BB등급 이하로 발행된 공모 회사채는 전혀 없습니다. 우리나라에는 투기등급 시장 자체가 없는 셈입니다. 심지어 투자등급 중 가장 낮은 BBB-등급으로 발행된 공모 회사채도 전무한 지경입니다.


투기등급이라고 불리지만 BB등급도 낮은 등급이 아닙니다. 아마 코스닥 시장에 주식이 상장된 기업 중에서 BB이상의 신용등급을 받을 수 있는 기업이 절반을 넘지 못할 걸요. 코스피 상장 기업이라고 해도 BB이하 등급을 받을 곳이 수두룩할 겁니다. 가계로 따지면, BBB등급과 A등급은 부유층, BB등급은 중산층 정도 될 것 같습니다.


공모 회사채 시장에서는 A등급도 기를 펴지 못합니다. 기관투자가들이 선호하지 않거든요. AA등등급은 돼야 증권사들이 인수경쟁을 하고 원하는 만큼 발행을 할 수 있습니다. 고작 100개를 조금 넘는 기업이 공모 회사채 발행의 80% 이상을 차지합니다. 대부분 삼성그룹, 현대차그룹, LG그룹, SK그룹, 포스코그룹, KT그룹 등 국내 최고의 대기업집단에 속한 곳들이죠.


공모 회사채를 발행하지 못하는 국내 대부분 기업들은 신용경색이나 유동성위기에 취약합니다. 차입금을 주로 1년 이하, 길어야 2년 정도의 단기로 조달해야 하거든요. 국내에서 내로라하는 기업이나 입성할 수 있는 코스피 상장사의 차입금 중에서 40%가 1년 이내에 만기를 맞습니다. 전체 차입금의 절반 가까이를 매년 갚거나 연장해야 하는 엄청난 부담에 직면합니다. 실적에 문제가 없는 정상적인 기업이라고 해도 금융위기나 신용위기 상황에서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입니다.


공모 회사채를 발행할 수 없어서 그렇습니다. 금융기관에서 차입하거나 사모채 또는 P-CBO에 의존해서는 매년 빚 갚을 걱정에 사로잡힐 수 밖에 없습니다. 공모 회사채를 장기로 발행할 수 있으면 갑자기 위기국면에 봉착해도 당장 갚아야 할 빚을 줄일 수 있습니다. 만기를 여러 기간에 분산시켜 놓을 수 있으니까요.  


물론 공모 회사채를 발행할 수 있는 기업이라고 해도 위기에서 자유롭지는 않죠. 국내 기업들이 발행하는 회사채 만기가 그리 길지 않거든요. 금리가 빠르게 상승하기 시작한 지난해 이후 공모 회사채의 차환발행이 어려워져 자금사정이 나빠진 기업들이 정말 많습니다. 그래도 회사채를 발행할 수 없는 곳과 비할 바는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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