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재무제표를 읽는 사람들의 기사는 작성 후 최소 1주일 경과된 시점에 무료 공개되고 있음에 유의 하시기 바랍니다.

'2018년 아시아나항공을 대하는 산업은행의 태도는 국책은행 같지 않았습니다. 일시적인 부실기업을 살리는 본연의 역할이 아니라, 더 늦기 전에 대출을 회수하려는 민간 은행의 모습에 더 가까웠습니다. 산업은행과 맺은 재무구조개선 약정은 아시아나항공의 목을 더 옥죄이게 됩니다'

--재무제표를 읽는 사람들의 생각


산업은행이 언젠가부터 헛발질을 하고 있습니다.


국책은행인 산업은행은 1997년 외환위기 이후 부실 대기업 구조조정을 전담하다시피 했습니다. 경영실패로 유동성 위기에 빠졌거나 도산 직전에 몰렸던 대기업들은 거의 예외 없이 산업은행의 지원과 통제를 받은 경험이 있습니다. 주요 재벌그룹 중에서 산업은행 치하(?)에 놓여보지 않은 곳은 아마도 삼성그룹과 SK정도가 아닐까 합니다. 현대그룹, 효성그룹, 코오롱그룹, 심지어 LG그룹조차 2000년대 초반 LG카드 사태로 산업은행에 머리를 조아려야 했지요.


우리나라 금융시장이 지금처럼 발전하기 전에는 산업은행이 시설투자자금의 젖줄이자, 도산을 막아주는 구세주와 마찬가지였습니다. 산업은행 덕에 위기를 넘기고 재도약에 성공한 기업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산업은행이 헛발질을 하기 시작합니다. 산업은행의 지도 아래 구조조정을 한 기업들이 살아나기는커녕 쇠락의 길을 걷거나 아예 저승행 열차를 타는 일이 잦아집니다. 까놓고 말해 과거 10년 동안 이렇다 할 성공의 기록을 써 본 적이 있나 싶습니다. 국책은행으로서 책임의식을 보여주기는커녕 이런 저런 구설수에 오르내립니다.


대우조선해양은 진기명기에 나올 만한 최고의 헛발질입니다. 산업은행이 1999년 천문학적인 공적자금을 투입해 살려 낸 대우조선해양은 2009년 금융위기 전까지 대호황을 누리며 승승장구했습니다. 하지만 산업은행은 대우조선해양을 민영화해 공적자금을 회수하지 않았죠. 그리고는 20년래 최대의 분식회계를 저질렀을 때는 사실상 눈을 감고 있었습니다.


한국을 대표하는 건설사였던 대우건설은 오랫동안 산업은행의 자회사로 있는 동안 그저 그런 건설사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주가는 반의 반 토막이 나 산업은행에 엄청난 손실을 입혔고요. 대우건설로부터는 '제발 경영간섭 좀 그만하라'는 항의를 받기도 했습니다. 최근에는 경영권을 위양 받았던 한진중공업그룹이 사실상 해체되는 지경까지 갔습니다.


산업은행을 둘러싼 불신과 의혹이……


아마 산업은행이 가장 많은 불신과 의혹을 받는 사례 중 하나가 금호그룹 구조조정일 겁니다. 금호그룹이 2009년 워크아웃(아시아나항공은 자율협약)에 들어갔다 6년 만에 졸업했을 때, 박삼구 회장이 그룹을 되찾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준 게 산업은행입니다. 부실책임이 있는 오너에게는 팔지 않는다는 원칙과는 달리 박삼구 회장에게 금호산업에 대한 우선매수청구권을 준 장본인입니다. 그것도 금호산업 대출이 가장 많았던 우리은행 등 다른 채권은행들의 동의 없이 박삼구 회장 부자와 합의부터 했다고 합니다(이미 여러 언론에 보도된 바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나중에 다시 할 기회가 있을 겁니다. 아주 길고 불쾌한 이야기입니다.


아시아나항공은 2014년 자율협약에서 졸업하지만, 여전히 산업은행의 영향력 아래 있었습니다. 산업은행은 아시아나항공의 주채권은행이었고 금호산업과 금호석유화학에 이은 3대 주주이기도 했습니다.



자율협약에서 졸업했지만 아시아나항공은 경영난이 심각했습니다. 2015년말 부채비율이 900%를 넘어갈 정도로 재무구조가 나빴죠. 그런데 금융시장에서는 이미 요주의 기업으로 찍혀 회사채 발행도 쉽지 않았습니다. 사람은 피가 돌아야 살고 기업은 돈이 돌아야 사는데, 돈이 나가기만 하고 들어오지 않으면 어떤 기업이라도 배겨낼 재간이 없습니다.



결국 2015년에 비상경영을 선포하고 내부적인 구조조정에 돌입합니다. 외부에서 자금조달이 안되니 보유 자산 매각에 나섭니다. 2016년에는 금호터미널과 금호아시아나플라자사이공을 팝니다. 2017년에는 대우건설 지분을 손해보고 매각 하지요.


하지만 자금사정은 별로 나아지지 않습니다. 자율협약에서 졸업하자마자 설립한 에어서울에 유상증자를 하고 에어버스에 대형 항공기인 A380을 도입(그것도 리스가 아닌 직접 구입)하는 등 항공기를 확충하는데 매년 수 천억 원이 지출되었으니까요.


게다가 금호터미널은 박삼구 회장에게 완전 헐값에 넘겼습니다. 자산가치가 1조원이 넘는다는 곳이었는데, 고작 2700억원 받고 팔았거든요. 자산매각의 효과를 제대로 보지도 못한 겁니다.


당시 박삼구 회장은 아들 박세창과 금호기업을 설립해 금호그룹 재건에 시동을 걸고 있었습니다. 박 회장은 동시에 아시아나항공 이사이기도 했지요. 박 회장이 금호그룹 재건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금호터미널을 자신이 소유한 금호기업에 싸게 팔게 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죠(이 이야기도 나중에 다시 할 기회가 있을 테니 일단 넘어갑니다).


아시아나항공은 자력으로 재무구조 개선이 불가능했습니다.


아시아나항공의 자금난은 목까지 차올라 온 상황이었습니다. 자율협약을 졸업한 이후에 만기가 긴 장기차입금이 줄고 1년 안에 갚아야 하는 단기성차입금이 급격히 증가합니다. 기존 차입금 만기는 자꾸 짧아지는데 회사채 발행이 불가능해서 그렇습니다. 2017년말에는 차입금의 딱 절반이 단기화됩니다. 돈 버는 것도 시원치 않은데다 자금조달 길이 막혀서 어디서 돌려 막기를 할 수도 없는 처지였습니다. 모기업인 금호산업 역시 사정이 좋지 않기는 마찬가지였으니 그야말로 떨어지는 칼날 아래 목을 내밀고 있는 형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결국 아시아나항공은 지난해 4월 산업은행과 다시 재무구조개선 약정을 맺게 됩니다. 그런데, 이 재무구조개선 약정의 성격이 좀 수상합니다. 실제 목적은 기업 살리기가 아니라 채권은행의 '자금회수'였나 싶을 정도입니다.


아시아나항공은 스스로 재무구조를 개선할 능력이 당시에 없었습니다. 여전히 돈 벌이가 시원치 않았고, 공모 회사채 시장에서는 강퇴를 당한 상황이었습니다. 재무구조 개선의 핵심은 대규모 자본확충입니다. 그러나 주가가 액면가를 밑돌고 있어서 유상증자도 사실상 불가능했습니다.


실제로 2016년에 아시아나항공이 1600억원 규모의 유상증자를 실시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가가 낮다 보니 발행가격이 액면가인 5000원이었고, 이후에 주가가 더 떨어져서 신주 발행가격이 주가보다 더 높아졌습니다. 우리사주조합에 배정된 20%의 주식이 전액 미청약되고 2대 주주였던 금호석유화학과 일반 주주들도 대부분 청약을 포기합니다. 실제로 납입된 자본금은 506억원, 그 중 500억원은 금호산업이 납입한 것이었습니다.


◇재무구조개선약정, 채권단 차입금 회수가 목적이었나?


유동성 위기에 처한 기업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시간입니다. 벌어서 갚든 팔아서 갚든 시간이 허락되어야 합니다. 조금씩 나눠서 갚을 수 있게 여건을 만들어 주어야 빚을 갚으면서 먹고 살 수 있는 것이죠. 산업은행이 아시아나항공을 살릴 생각이 있었다면 신규 여신을 제공하지는 않더라도 기존 차입금의 만기를 길게 연장해 주는 거라도 했어야 합니다.


그런데 산업은행과 맺은 재무구조개선 약정은 1)자산을 팔고 자본을 확충할 것 2)그 실적을 정기적으로 보고할 것, 이게 전부입니다. 있는 자산 팔고 증자해서 빚 갚으라는 얘깁니다. 그렇지 않으면 대출 회수하겠다고 협박합니다.



아시아나항공은 전방위적으로 자금확보에 나섭니다. 그래 봐야 전부 자산을 내다 파는 게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습니다. 대한통운 지분을 팔고 금호사옥을 매각하고, 아시아나IDT와 에어부산을 상장합니다. 심지어 항공기 구매를 위해 지불한 선급금도 도로 받아 옵니다.


자본확충용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전편에서 한번 살펴 본) 전환사채 1000억원와 영구채 발행 정도였습니다. 그나마 2년 후에는 상환압력을 받게 되는 조건으로 발행된 것이었고, 당시로서는 주식으로의 전환을 기대하기 어려웠습니다. 영구채 역시 자본으로 인정받을 가능성이 높지 않았습니다.


아시아나항공은 그렇게 해서 약 9000억원의 차입금을 갚습니다. 그런데 이 재무구조개선 노력은 오히려 아시아나항공의 목을 더욱 죄이는 결과를 낳습니다. 단기성 차입금 비중은 50%에서 38%로 낮아집니다. 그러나 그건 수치상의 효과일 뿐 실질적으로는 유동성 압박이 훨씬 심해집니다.


외부차입이 많은 기업이 유동성 위기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만기가 장기적으로 잘 분산되어야 하고(그래야 매년 조금씩 나누어 갚을 수 있죠. 그래서 회사채 발행이 중요합니다.) 금융기관 차입금의 비중이 적정한 선에서 잘 유지되어야 합니다.


기업어음이나 회사채, 유동화사채 등의 시장성차입금은 상환압력이 높아졌을 때 기업이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이 별로 없습니다. 채권자가 불특정 다수인데다 이해관계가 모두 각각입니다. 협상창구가 없습니다. 평소에는 차환이 잘 되겠지만, 유동성에 문제가 있다는 게 발각(?)이 되면 상환하는 것 밖에는 별 도리가 없습니다.



아시아나항공이 지난해 상환한 약 9300억원 중 2820억원은 금융기관의 차입금을 갚은 것입니다. 산업은행이 앞장서서 저리로 제공하던 장기차입금 약 1000억원 정도를 회수합니다. 국책은행이 대출을 회수하는데 시중은행들이 가만히 있을 리 없습니다. 은행들은 아시아나항공의 돈 될만한 자산들을 거의 전부 담보로 잡고 있었습니다.



은행들의 자금회수는 그나마 조금 열려 있던 시장성 차입의 문을 완전히 닫아 버립니다. 기업의 자금사정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게 은행입니다. 담보까지 잡고 있는 은행이 발을 빼는데 누가 돈을 빌려주겠습니까?



대표적인 단기 시장성 차입선인 기업어음과 전자단기사채는 사실상 사라집니다. 기업들이 가장 빈번하게 이용하는 차입선을 잃은 것입니다. 만기 도래한 9개 회차의 회사채는 전액 상환됩니다. 이를 차환할 회사채를 전혀 발행하지 못하게 됩니다. 늘어난 것은 장래매출채권 등을 담보로 하는 유동화사채 뿐입니다.


신용등급 트리거는 아직 살아 있습니다


산업은행의 자금회수는 아시아나항공의 신용등급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한국신용평가와 나이스신용평가가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유동화차입에 대한 의존도가 커진데다 금융기관 차입금이 줄어들었다는 것입니다.



아시아나항공의 차입금에는 각기 기한이익상실 요건이 있습니다. 보통 요건이 충족되었다고 해서 곧바로 기한이익상실이 되지는 않습니다. 다 같이 망할 수는 없으니까 아주 심각하지 않으면 그냥 넘어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신용등급이라는 트리거가 작동하면 얘기가 달라집니다. 지금 BBB-등급에 부정적 관찰 대상인데, 한 등급 떨어져서 BB+ 이하로 가거나 모든 사채가 상환돼서 신용등급 자체가 사라지면 사실상 유일한 자금조달 수단이라고 할 수 있는 유동화사채 전부가 기한이익상실 요건을 충족합니다. 그리고 유동화사채가 기한이익을 상실하면 모든 금융리스부채 역시 기한이익을 상실하게 됩니다.


이건 산업은행도 막을 수 없습니다. 산업은행이 아시아나항공에 1조6000억원을 긴급 지원하고 금호그룹이 아시아나항공 매각을 공식화했지만, 신용평가사들이 등급을 유지할 명분이 될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더 지켜봐야 합니다.